유달리 매서웠던 올 겨울 추위에 한껏 움츠러들었다가 어느덧 입춘 우수가 지나자 벌써부터 봄을 기대하는 마음에 몸도 함께 스멀거린다. 창 밖에는 겨울비도 봄비도 아닌, 간절기의 밤비가 고즈넉이 내리고 있다. 미물일지언정 곤충들은 인간보다 자연의 변화에 몇 배나 민감하여 겨우내 어디 숨어 있다가 나왔는지 어린 파리들이 부엌 주위를 슬슬 돌아다니기 시작하고 묵은 쌀 항아리에선 검정 깨알 같은 바그미가 며칠 새에 부쩍 불어나 밥 짓는 아낙의 손을 번거롭게 한다.
곤충들의 영악함에 머리를 내젓다가 지난봄에 경험했던 식물들의 기민함을 떠올리니, 만물의 변화를 일으키는 시간이란 것의 정확함이 새삼 놀랍게 다가온다.
작년 상반기까지 나는 지금은 한낱 추억거리가 되어 버린 수인선 협궤열차가 다니던 철로를 따라 조성된 녹지대와 인접한 동네에 살았었다. 협궤열차 운행이 끊긴 지도 십수 년이 넘었건만 그 녹지대 아래의 철길만은 그대로 남아 웃자란 잡초며 들꽃 사이로 허물어진 시간의 눈금인양 드문드문 자취를 드러내고 있었다. 철길 양 옆으로 실개천이 흐르고 그 양 옆 둔치의, 푸른 잔디와 갖가지 나무들이 심어져 있는 녹지대에는 간편한 운동시설은 물론 벤치와 피크닉 탁자까지 마련되어 있어 인근 주민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
지난봄 언젠가 오늘처럼 밤비가 촉촉이 내리고 난 다음 날, 나는 산책을 나갔다가 그 녹지대 전체가 밤사이 온갖 풀꽃들로 천연의 화원이 되어 있는 걸 보았다. 누가 일부러 심지도 않은 작고 여린 색색의 꽃들이 어찌나 소담스럽게 무더기로 피어나 있는지 나는 탄성을 터뜨렸다. 아, 오묘한 어머니 대지시여! 나는 그 여린 생명들의 싹을 속 깊숙이 보듬고 있다가 때가 되니 아낌없이 환희롭게 피워 올리는 땅의 모성에 새삼 감격했다. 나는 틈만 나면 그 녹지대에 나가 서성이며 도시생활에 찌든 내 무채색의 감성에 순도 높은 자연의 빛깔을 부지런히 옮겨 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곳에서 시끄러운 기계음을 듣는 것과 동시에 그 찬란하던 꽃밭이 삽시간에 사라지며 단순한 풀밭으로 변하는 것을 목도하였다. 시 환경과에서 나온 일꾼들이 잔디 깎는 기계로 녹지대 전체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왜? 어째서? 절로 핀 것들이 절로 다 질 때까지 기다리면 안 된단 말인가? 내 속에서 항의의 아우성이 빗발쳤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풀 향기 물씬 풍기는 그곳에 다시 나온 나는 그 항의를 철회했다. 영롱한 꽃밭이 사라진 자리에 짙은 푸르름으로 엎드려 누운 풀밭이 오히려 그윽하고 더 좋았던 것이다. 시간은 그렇게, 변화의 때를 정확히 알고 움직이는 우주의 정원사이다.
구자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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