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조류독감에 대한 공포가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지만 88년 전 대구에는 이 보다 더한 살인독감이 덮쳤다.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은 지 8년만인 1918년 무오년 가을. 조선의 민초들은 망국민의 비애와 더불어 진저리치는 가난을 헤쳐가기도 벅찬 판에 이름도 생소한 역병인 '서반아감기'. 즉 세계적인 '스페인독감'과 싸워야하는 불운과 마주쳤다.
이해 9월초부터 번지기 시작한 독감은 하순에 들며 전국을 휩쓸었다. 조선총독부도 처음엔 은폐하는 분위기였다. 자신들의 그릇된 방역대책의 결과로 비칠 가 싶어서였다. 그러다가 수천만 명의 사망자를 낸 제1차 세계대전의 파생물로 유럽에서 시작된 미증유의 급성전염병임이 밝혀지자 뒤늦은 계몽에 부산을 떨었다. 총독부 주치의인 아리마 에이조(有馬英三 )의 담화를 빌어, 독감의 병원균은 '인플렌자 균'임을 밝히고, "인체의 저항력은 약한 반면, 전염은 속하다"며, 주의사항들을 늘어놓았다.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18년 봄부터 시작된 스페인독감은 유럽에서만 2천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것으로 알려진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이 세기적인 대재앙이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조선에까지 번져, 이해 9월부터 1919년 1월말까지 넉 달 동안 대구는 물론 전국에서 742만여 명의 환자와 14만여 명의 사망자를 내기에 이르렀다. 당시 2천만 조선인의 약 37%가 독감에 걸린 셈이며, 이 중 약 2%가 사망한 꼴이었다. 조선내의 일본인은 같은 기간 16만여 명이 발병했으나 1300여명만 사망, 조선인치사율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조선인 발병율과 치사율이 일본인들에 비해 높았던 것은 평소 위생관념이 저조했던 까닭도 있었지만 만성적인 영양부족으로 인한 저항력결핍과 벅찬 치료비를 겁내어 진료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열악한 의료형편과 노동환경 탓이 더 컸다. 독감의 주된 피해자가 의외로 20대와 30대전반의 젊은이들이었다는데, 이들 환자들은 영양섭취나 충분한 휴식에 앞서 하루살이 노동현장에 나설 수밖에 없어 병을 키웠다. 이로 인해 앓아눕고 죽어나가, 농촌에선 한때 인력이 딸려 가을걷이도 못할 정도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총독부기관지 에는 '독감이 산출한 비극', 남편이 감기로 죽자 아내도 따라 죽어', '삼수군의 군수도 죽어' 등, '죽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연일 보도되었다. 이 신문은 또 11월19일 현재 경북도내의 환자 수는 12만9170명이며, 이중 사망자수는 396명, 대구는 5149명 발병에 11명이 사망했다고 경북경찰의 집계를 인용해 보도했다. 그러나 일경들이 밝힌 사망자숫자에는 어딘가 축소한 혐의가 없지 않았다. 공포심리확산과 같은 사회적 파문을 염려해서였던 것 같다. 당시의 사정을 기록한 예천군의 한 농군의 일기('저상일월')를 통해 그런 의혹이 비춰진다.
"10월 10일. 돌림감기가 만연되었는데. 대구공진회(共進會. 박람회)에서는 하루에 죽은 사람이 400명이라 한다.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각 도, 각 읍에 감기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대도시의 약제가 모두 바닥이 났다고 한다."
'하루 400명 사망설'은 좀 과장된 듯 하나, 일경의 발표보다는 훨씬 많았음이 분명하다.
당시 대구에는 마찌다(町田), 사헤끼(佐伯), 마유미(眞弓)약국 등 일인들이 경영하는 양약방과 몇몇 개업의원도 있었다. 그러나 주머니사정이 약한 조선인들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결국 약전골목의 한약방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으나 워낙 환자가 몰려 일부 약제가 바닥났던 것이다. 이 바람에 "문전옥답은 신작로로 내주고, 얼굴께나 예쁜 년은 왜놈에게 빼앗겼네. 말께나 하는 놈은 감옥에 가고, 힘께나 쓸 놈은 '목도'나 멘다."던 그 자조의 가락 중, 끝 구절을 "힘께나 쓸 놈은 돌림감기로 간다"로 고쳐 부르는, 처량한 무오년이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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