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출향 인사와 차 한잔-소방방재청 박광길 혁신기획관

한 사람이 꾸면 '꿈'이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꾸면 '희망'이라는 말이 있다.

대구·경북, 특히 대구에는 여러 사람이 함께 꾸는 그런 희망이 없다는 말을 곧잘 한다. 그것도 타지인이 아니라 대구·경북 사람들이 더 자주 더 쉽게 말한다. 희망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능력과 지위가 되는 사람들도 마치 남의 일인양 대안 없이 자조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재난심리와 방재산업 전문가로 통하는 박광길(朴光吉·57) 소방방재청 혁신기획관은 남다르다. 대구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방재산업(防災産業)의 메카, 대구' 이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가 난지 3년이 지났습니다. 상인동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도 있었고요. 그런 대구가 지금은 안전한 도시로 바뀌었습니까? 대구가 방재산업의 메카로 거듭난다면 사고 희생자 분들이 저승에서나마 기뻐할 것입니다."

◆걸음마 단계 방재산업=우리나라에서 '방재산업'이란 용어는 생소하다. 박 기획관이 처음으로 만들었다. 법률 용어로는 재난안전관련산업이다.

걸음마 단계이다보니 업종 분류도 명확하지 않고 현황 파악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방재산업이라고 하면 소화기나 소방차를 만드는 산업 정도로 생각한다고 한다.

연구도 미약하다. 그가 심포지엄 발표를 위해 산업연구원에 있는 2천832개의 관련 논문을 검토했으나 방재산업에 관한 연구는 전무했다.

미국 일본 중국 등은 방재산업을 국가 미래전략 산업으로 육성하고 있다. 방재는 통치와도 관련되지만 군수산업과도 직결되기 때문에 정부가 관심을 둔다.

"재난관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방입니다. 재난을 예상하고 발생 후 얼마나 빨리 정보를 획득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화재 붕괴 충돌 등 인적 재난뿐 아니라 태풍 지진 등 자연재난도 관리의 대상이 되는 이유죠. 방재산업의 영역은 무궁무진합니다."

◆우연한 공부=박 기획관이 자나깨나 재난관리 공부에 몰두하게 된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다. 대구 토종으로 계성고와 영남대를 졸업한 뒤 7급 공채로 공무원이 된 그는 경주시와 경북도에서 각각 1년씩 근무한 뒤 주로 행정자치부에서 근무했다.

그런 그가 외국인으로선 처음으로 미국 재난관리청(FEMA)에 파견돼 2000~2002년 1년6개월간 근무하는 행운을 잡았다. 미국에서 재난관리 1인자로 꼽히는 제임스 위트 씨가 방한해 만난 인연으로 파견을 주선했다.

FEMA는 홍수 때 쓰레기를 치우는 군 부대가 전신이다. 홍수 쓰레기는 교각과 제방 붕괴의 주원인이라 군 작전을 벌여 치운 것.

그는 그 곳에서 미국은 재난관리를 정부와 군 부대가 주로 맡고 있는 것을 봤다. 재난관리를 과학적인 네트워크와 하이테크 기술로 관리해야 되겠다는 것도 느꼈다. 미국에서 가장 작은 주인 델라웨어(Delaware)가 재난상황실을 만드는 기술로 '재난 상황 정보'를 팔아 먹고사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미국은 허리케인이 생기면 그 핵에 비행기를 띄워 세기와 항로 정보를 받습니다. 지진이 일어나면 진원인 바다로 들어가는 선박도 있습니다. 나사(NASA)가 홍수 예측 관측선을 관리하지요. 일본은 로봇이 재난을 관리하고 있고요."

이런 외국의 재난장비에 비해 우리나라는 너무도 빈약하다. 재난 상황을 전체적으로 파악해 대처 방안까지 내놓는 선진국과 달리 재난 상황만 단순 파악하는 우리나라 상황관리 차량을 그는 개인적으로 '깡통차'라고 부른다.

귀국 후에도 그는 재난심리와 홍수보험 등 재난관리에 대해 계속 공부했다. 연세대 서울산업대 서울시립대 등지에서 강의도 했다. 각종 정책 제언이 담겨있는 '프로페셔널 재난관리'란 책을 조만간 낼 예정이다.

◆"방재산업 허브 대구"=매우 적극적인 성격인 박 기획관은 아이디어도 풍부하다. 밀폐된 공간 화재에서 뛰면 빨리 죽을 위험성이 높다는 점에 착안해 경북대의 도움으로 산소마스크 특허를 따냈다. 홍수가 나면 가장 흔한 것이 물이지만 가장 귀한 것도 마실 물이라고 보고 휴대용 정수기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핸드백에 들어가는 예쁜 소화기는 치한 퇴치용으로 쓰인다고 본다.

이런 박 기획관이 요즘 골몰하는 것은 대구다. 시간만 나면 '대구 방재산업 밸리' 그림을 그린다. 본부, 네트워크관, 하이테크관, 소방장비관, 중소기업관….

대구가 방재산업 클러스터를 만들기에 최적지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걸출한 포항공대와 경북대 등 대학이 많고, 포항 구미 산업단지가 가까이 있어 클러스터가 금방 형성될 것"이라면서 "대구시민이 새로운 산업을 갈망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지하철 화재 사고가 소방방재청 개청의 결정적 계기가 됐 듯이 명분에서도 대구가 앞선다"며 "대구가 방재산업의 허브가 되겠다고 나서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벤치마킹은 없다=방재산업 밸리를 얘기하면 사람들은 벤치마킹부터 해보자고 한다. 하지만 선행 모범 사례가 없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방재산업이 무리를 지어 있는 곳은 없다.

박 기획관은 이를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베끼면 2등밖에 못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 게다가 세계 최초라서 그는 더욱 욕심이 난다. 창조는 그가 가장 즐기는 일인 것이다.

대구에서 방재산업 육성에 대한 얘기가 많았으나 지금까지 추진되지 않고 있는 것은 대구시 공무원들 도전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보고 있다. 예산을 손에 쥐어주지 않으면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고 느낀다. 최근 대구시 전략기획단이 주최한 심포지엄에 참석했던 그는 크게 놀랐다. 심포지엄에 참석자 대다수가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경청한 것. 박 기획관은 "그렇게 많은 심포지엄 토론회에 가봤지만 참석자의 3분의 2가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것은 처음 봤다"며 "바로 방재산업에 대한 관심 아니겠느냐"고 해석했다.

박 기획관 혼자 꾸고 있는 대구 방재산업 밸리 조성의 꿈을 대구 시민 전체가 희망으로 느끼게 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최재왕기자 jw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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