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과학을 알아야 교양이 잡힌다] 뉴턴의 성격과 악연 과학자들

자연과학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합리적이고 보편적이며 이성적인 것을 먼저 생각한다. 자연을 탐구하는 과학자들은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비해 모든 면에서 합리적으로 행동할 같지만, 간혹 아주 비이성적이며 비합리적인 행동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특히 아주 창의적 업적을 남긴 위대한 과학자들 중에는 종종 우울증이나 소심함과 같은 성격적 특이성을 지닌 사람들도 많았다.

만유인력 법칙을 창안한 위대한 과학자 뉴턴은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특히 비이성적이고 격렬하게 반응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뉴턴의 영향력이 약하던 젊은 시절 그는 자신의 분을 참지 못하고 격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으며, 나중에 왕립학회 회장이 된 뒤에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모습도 나타냈다. 이러한 뉴턴의 모습은 정치적으로 독재자의 행동유형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독재자 뉴턴'이라는 제목의 책까지 출판되었다.

1672년 뉴턴은 빛과 색깔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로버트 후크와 격렬한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당시 로버트 후크는 과학계에서 영향력이 있었던 과학자였고, 뉴턴은 아직 과학계에 그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다. 프리즘에 의한 빛의 분산과 관련된 논쟁이 있은 뒤 뉴턴은 외부와의 관계를 끊고 격리 생활을 하면서 연금술과 같은 신비주의적 학문에 탐닉하는 특이한 행동을 했다. 또한 미적분 발명의 우선권을 놓고 라이프니츠와 논쟁을 벌일 때에도 보통 사람이 보기에 좀 지나친 행동을 보였다. 처음에는 추종자들이 부추겨 마지못해 시작한 논쟁이 점차적으로 추종자들조차 말리지 못하는 추악한 싸움으로 변했으며, 결국 이 싸움은 두 사람이 죽으면서 끝났다.

몇몇 뉴턴 연구자들은 뉴턴이 생애를 통해 논문을 발표할 때마다 심리적 불안감을 보이고,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지극히 비이성적이고 격렬한 반응을 보인 이유는 뉴턴이 어린 시절에 겪었던 모성 결핍 때문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유복자로 태어난 뉴턴은 2살 때 어머니가 재가를 해서 그의 곁을 떠났고, 주로 외할머니 손에 의해 길러졌다. 그 뒤 뉴턴의 의붓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올 때까지 9년 동안 어머니와 떨어져 지냈다. 어린 시절에 뉴턴이 겪었던 이런 모성 결핍이 생애를 통해 뉴턴의 성격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1686년 왕립학회에 '프린키피아' 제 1권의 완성된 원고가 접수되었을 때, 후크는 뉴턴이 자신의 생각을 표절했다고 주장했다. 이 당시 뉴턴은 과거와는 달리 과학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성장했고, 후크의 영향력은 과거와는 달리 현저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당시 쇠락해가던 후크로서는 뉴턴이 자신의 책에서 후크도 역제곱법칙에 관한 생각을 했다는 사실만을 인용해주는 정도로도 만족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광학에 관한 글에서 후크와 격렬한 논쟁을 한 쓰라린 경험이 있었던 뉴턴은 이 정도의 아량도 보여주지 않았다. 후크의 표절 주장에도 불구하고 뉴턴은 자신의 원고를 계속 집필해갔으며, 심지어 자신의 원고에서 후크에 대한 거의 모든 인용을 삭제해버렸다. 또한 뉴턴은 후크가 죽기 전까지는 후크와 논쟁을 했던 빛과 색깔에 대한 내용이 포함된 '광학'을 출판하지 않았으며, 후크가 몸담고 있었던 왕립학회 회장직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뉴턴의 특이한 성격은 영국 왕립 천문학자 플램스티드와 정전기 통신의 발견자인 스티븐 그레이에 대한 뉴턴의 독선적인 태도에도 잘 나타나 있다. 단지 자신이 미워하는 플램스티드와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레이는 자신의 발견을 뉴턴의 생애 중에는 인정을 받지 못하고 왕립학회 회원도 되지 못하다가 뉴턴이 죽은 후인 1733년 66세의 나이로 비로소 왕립학회 회원이 될 수 있었다. 뉴턴의 특이한 행동으로 인해 후크, 라이프니츠, 플램스티드, 그레이 등은 뉴턴과 평생 악연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임경순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과학사 교수, 포스텍 과학문화연구센터장)

짚고 넘어가요

▨ 미적분법의 발견

인류 역사에서 수학이 발달하게 된 계기는 토지의 공정한 분배였다. 기하학은 이를 기반으로 개념을 넓혀갔다. 그러나 면적이나 부피를 구하는 방법에 대해 정확한 개념이 확립된 것은 적분학이 창시된 뒤에야 비로소 가능해졌다.

미적분학은 영국의 뉴턴과 독일의 라이프니츠가 독립적으로 창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그와 같은 개념은 오래전에 싹텄다. 예를 들어 BC 3세기 아르키메데스나 유클리드는 오늘날의 구분구적법과 비슷한 방법으로 평면의 넓이를 구했으며, 그 후 많은 수학자들에 의해 연구됐다. 뉴턴과 라이프니츠는 이를 더 확장시키고 체계화했다.

뉴턴이 미적분에 대해 쓴 최초의 논문은 '해석학'(1669)으로 소수의 수학자에게만 읽혔다. 그 구체적인 적용과 발표는 '프린키피아'(1687)를 통해서였다.

뉴턴이 중년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연구실에서 보낸 데 비해 라이프니츠는 수학자이자 철학자, 법학자, 신학자, 언어학자, 역사가이자 외교관, 정치가까지 왕성한 사회 활동을 했다. 그는 이런 활동 가운데 1684년에서 1686년 동안 미적분학을 만들어 발표했다.

두 사람은 미적분학의 기호에서 차이를 보였다. 뉴턴이 만들어 사용한 미적분 기호는 수학이 아니라 물리학을 표현하는 도구로서 자신이 사용하기 편리한 기호를 썼기 때문에 읽기가 어려웠다. 이에 비해 라이프니츠는 미분 기호로 문자 d를 썼으며, 적분 기호는 합을 의미하는 머리글자 s를 잡아늘인 ∫를 사용했다. 그 결과 상대적으로 더 불편하고 비합리적인 기호체계를 가진 뉴턴의 방법을 고수한 영국은 해석학의 발달이 독일에 비해 더 늦어졌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참조 : 인류사를 바꾼 100대 과학사건(학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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