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슈 포럼] 대구상의, 새로운 100년은…

대구상의 창립 1세기, 되돌아보면 전반 50년은 형극의 길이었고, 후반 50년은 고난과 도전의 길이었다. 전반 50년은 일본제국주의의 상권침탈에 대항해 대구민의소가 출범하였으나, 일제 강점기를 통해 일본의 눈치와 뜻에 맞추어 활동하던 시기였으며 여기에다 해방이후 혼란기와 한국동란기 까지를 포괄한다. 후반 50년은 한국동란 중에 통과된 상공회의소법에 따라 대구시 행정구역을 관할구역으로 하는 오늘의 대구상공회의소가 공법인으로 출발한 1954년 이후를 말한다.

대구상의의 모태인 대구민의소는 1906년 8월에 역사적인 탄생을 보았으며, 백성의 지혜개발(開發民智), 산업진흥(擴張民業), 독립부강(獨立富强)의 기초확립을 설립취지로 내세웠다. 이를 배경으로 1907년에는 전 국민이 담배를 끊어 나라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던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일이다. 바로 이것이 대구상의의 창립이념이요, 100년의 역사 가운데 가장 자랑스러운 대목이라 하겠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는 일본의 식민정책과 대륙침략정책에 동조 협력하는 상공단체의 길을 걸었다. 1915년에 대구상업회의소, 1930년에 대구상공회의소, 1944년에 경상북도 상공경제회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그 본질에는 변동이 없었다. 해방이후에는 이 조직이 폐지되었다가, 1946년 경북상공회의소를 만들어 혼란기와 한국동란기에 지역상공업계를 위해 약 7년간 임의단체로 활동했다. 참으로 암울했고 어려웠던 전반 반세기였다.

후반 반세기는 대구상의가 공법인이 된, 1954년 1월 여상원(呂相源) 초대회장 체제로부터 시작된다. 올해 제19대 이인중(李仁中) 회장시대에 들어섰으니, 어느새 52년의 세월이 흘렀다. 대구상의는 그간 국민경제의 발전단계와 지역경제의 성장수요에 발맞추어 제반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해왔다. 그간의 업적을 보면, 첫째 지역의 수장경제단체로서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경제정책의 수립과 집행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대구를 중심으로 한 고속도로와 철도망의 구축, 산업단지의 조성, 중소기업의 육성, 수출산업의 진흥, 대구은행을 비롯한 지역금융기관의 설립 등에 다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둘째, 지역상공업계의 이익단체로서 업계의 애로사항을 세제, 금융, 무역, 법률 면에서 해결하는 데에 앞장서왔으며, 회원업체에 대해 다양한 정보와 서비스의 제공, 각종 규제의 철폐와 인프라의 조성에 힘을 쏟았다,

셋째, 지역의 가장 비중 있는 민간공익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상의가 벌이고 있는 지속적인 경제동향의 분석과 조사연구, 각종 통계자료의 정비는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 대단히 귀중한 공헌이 된다. 그리고 프로축구단 대구FC의 창립과 2003년 하계 유니버시아드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지원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밖에도 세계 여러 나라 상공회의소와의 자매결연, 활발한 교류활동을 통해 지역과 기업의 국제화에 크게 기여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사업활동의 전개에 있어서 회원들의 눈높이를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는 비판, 다양성의 부족과 보수적인 업무추진, 전시적이고 외형위주의 사업전개, 회세(會勢)의 상대적 위축 등 따가운 지적도 적지 않다. 특히 환경변화에 대응한 지역경제와 업계의 변신을 제대로 선도하지 못함으로써 대구경제의 침체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는 쓴 소리도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아무튼 대구상의는 영욕이 엇갈리는 100년을 보내고,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고 있다. 회원업체들의 맞춤요구, 디지털이라는 시대적 조류, 세계화의 급진전, 지식기반경제시대의 전개, 지방분권시대의 개막이라는 새로운 시대환경에 알맞게 사업의 포트폴리오를 재구성해야 할 것이며, 선택과 집중을 통해 기업가정신을 고양시키고 지역혁신을 주도함으로써 국내외적으로 가장 모범적이고 사랑받는 상의활동을 전개해 주길 바라고 싶다.

최용호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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