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반 내무부(현 행정자치부)는 주민 참여도에 따라 전국 3만3천여 개 마을을 ▷기초마을(참여도가 낮고 정부가 추진중인 새마을사업들이 제대로 실천되지 않고있는 마을) ▷자립마을(주민 참여도가 높고 새마을사업들이 제대로 실천되고 있는 마을) ▷자조마을(기초와 자립마을 중간 정도) 등으로 분류, 각종 지원책을 차등화 했다.
정부는 시멘트와 철골을 기초마을보다는 자립이나 자조마을에 더 배분하거나 시상금을 줘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라는 자조정신 원리를 적용시켜 기초마을 주민들의 의욕과 참여도를 불러일으켰다.
결과 기초마을 수가 72년 53%에서 73년말에는 31%로 줄었고 75년말에는 11%로 급감했다. 새마을운동이 확산일로에 있던 73년까지만 해도 3분의 1 가량은 새마을운동에 적극 참여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기초마을 주민 참여도를 높이기 위해 기초마을 지도자들을 자립마을 지도자들과 함께 새마을운동 연수원에 입교시켜 정신교육을 시키고 자립마을로 보내 숙박을 하면서 기초와 자립마을간 차이를 눈으로 보고 스스로 배우도록 했다. 당시 기초마을 지도자들의 현지실습교육의 장이 됐던 마을을 찾아본다.
김기덕 감독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의 촬영장소로 유명한 주왕산 국립공원의 주산지가 위치한 청송 부동면 이전리. 골짜기 중 골짜기지만 새마을운동 덕택에 살기좋고 잘사는 마을이 됐다.
청송읍에서 동남쪽으로 22km거리에 위치한 이 마을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기 전인 1970년까지 이웃간 비방이나 화투로 긴 겨울을 보내는 퇴폐적인 분위기가 짙게깔린 곳이었다. 이때 마을의 몇몇 젊은이들이 "이대로 주저앉아 게으름과 가난을 대물림 할 수는 없다."는 각오를 하면서 마을에 조금씩 변화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가난이 지역 여건 때문이 아니라 주민들의 게으름과 단결력 부족에 따른 것이라고 판단한 청년들은 당시 군복부를 마치고 제대한 24살의 임도봉(61) 씨를 새마을지도자로 내세웠다.
새마을지도자로 뽑힌 임 씨는 마을의 주변환경을 정비하고, 주민을 단합해 대부분 산간밭에 경제작물을 재배, 부자마을을 만들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주민설득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보수적인 집성촌에서 아이 취급을 받았던 임 씨의 말이 먹혀들리 없었다. 가장 큰 힘은 청년들이었다. 청년들을 중심으로 무엇인가를 이뤄 어른들의 생각을 바꿔보겠다는 계획으로 71년 11월 마을의 숙원이던 교량(이전교) 공사에 착수했다. 돈과 기술이 부족한 가운데 유난히 추웠던 겨울날씨 등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다음해 4월 완공, 주민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줬다.
교량 공사를 계기로 주민들 사이에 협동심과 자긍심이 싹트자 여세를 몰아 한달간 철야작업을 통해 농로와 마을안길을 각각 2.5㎞, 폭 5m로 확장하고 쓰러지기 직전의 흙돌담 4㎞를 시멘트 블록으로 교체했으며 세천 540m와 소하천 750m에 석축을 쌓아 수해로부터 벗어났다. 또 마을 얼굴 바꾸기 대명사인 244가구 전체의 지붕을 초가에서 슬레이트나 함석 등으로 교체하기도 했다.
결과 1973년 아 마을은 청송군내 최초의 자립마을로 지정을 받았고, 100만 원의 특별지원금으로 간이상수도 시설공사에 착수, 186가구에 맑고 위생적인 식수를 공급하기에 이르는 등 3년만에 마을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었다. 마을 환경개선을 주민들은 소득증대 쪽으로 눈을 돌렸다. 우선 약간의 비에도 떠내가던 10개, 총연장 285m의 통나무보를 시멘트보로 바꿔 35ha를 수리안전답으로 만들고 야산 25ha를 개간, 소득이 높은 잎담배 재배에 나서 연간 6천여만 원의 소득을 올렸다. 또 조·보리·감자 등 저소득 작물을 고추재배로 바꿨다.
72년 청송군과 계약을 맺어 군유림 20ha에 밤나무 1천600여 그루와 낙엽송 4만8천여 그루를 심어 81년부터 연간 4천만 원의 소득을 올리기에 이른다. 마을 뒤 저수지(주산지)에는 73년부터 15만 마리의 치어를 방류, 주왕산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유료낚시터로 제공해 소득을 올렸는가 하면 마을 언덕에 46평 규모의 마을회관을 건립, 주민화합을 더욱 다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같은 실적에 대해 정부는 75년 다시 특별지원금(100만 원)을 보냈으며 77년 7월 임도봉 씨는 새마을지도자 7년만에 새마을훈장 협동장을, 이 마을은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잘 사는 마을이 되기 까지는 김춘옥(65) 회장을 중심으로한 40여명의 부녀회원들의 힘이 크게 도움됐다. 김 씨는 "부녀회원들이 기금 마련을 위해 인근 마을 공동 영농작업, 약초와 산나물을 캐기, 누에기르기 등으로 소득을 올렸다."며 "농협의 예금고를 키워가는 일도 부녀자들 몫이었다."고 기억했다.
이같이 남녀노소할 것 없이 새마을운동에 참가한 결과 70년 가구당 22만5천 원의 마을 소득이 76년 168만9천 원, 77년 190만 원으로 급성장했다.
당시 청송군 새마을 담당이었던 김주원(61) 씨는 "이전리의 발전은 당시 청년들을 중심으로 주민협동과 부존자원 개발로 소득구조의 다각화를 이뤄낸 결과"라고 말했다.
황재성기자 jsgold@msnet.co.kr 청송·김경돈기자 kd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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