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본래 본성이 솔직한 동물이라 일직선으로 살다가 일직선으로 죽을 뿐, 사람은 금단의 지혜의 과실을 따 먹은 덕과 벌인지 꾀 있고 슬기로운 동물이라 직선과 동시에 곡선을 그릴 줄 아는 재주가 있을 뿐, 10년을 하루같이 나는 너를 알고 너는 나를 알고 기거(起居)와 동정(動靜)을 같이하고 희로애락(喜怒愛樂)의 생활 감정을 같이하며 서로 사이에 일맥의 진정이 통해 왔노라. 나는 무수한 인간을 접해 온 10년 동안에 너만큼 순수한 진정이 통하는 벗은 사람 가운데서는 찾지 못했노라. 견디기 어렵고 주체 못할 파멸의 비극에 직면하여 술과 담배를 만들어 마실 줄 모르고 거문고를 만들어 타는 곡선의 기술을 모르는 솔직 단순한 너의 숙명적 비통을 무엇으로 위로하랴. 너도나도 죽어 없어지고 영원한 망각의 사막으로 사라지는 최후의 순간이 있을 뿐이 아닌가. 말하자니 나에게는 술이 있고, 담배가 있고, 거문고가 있다지만 애닯고 안타깝다. 말이 그렇지, 망우초(忘憂草) 태산 같고 술이 억만 잔인들 한없는 운명의 이 설움 어찌하며 어이하랴. 가야금 12현인들 골수에 맺힌 무궁한 이 원(怨)을 만분의 일이나 실어 날 수 있으며, 그 줄이 다 닳아 없어지도록 타 본들 이 놈의 한이야 없어질 기약 있으랴. 간절히 원하거니 너도 잊고 나도 잊고 이것저것 다 없다는 본래 내 고향 찾아가리라. 그러나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이것저것 다 있는 그대로 그곳이 참 내 고향이라니 답답도 할사 내 고향 어이 찾을꼬, 참 내 고향 어이 찾을꼬. 창 밖에 달은 밝고 바람은 아니 이는데, 뜰 앞에 오동잎 떨어지는 소리 가을이 완연한데, 내 사랑 거위야, 너는 지금도 사라진 네 동무의 섧고 아름다운 꿈만 꾸고 있느냐.
아아, 이상도 할사. 내 고향은 바로 네로구나. 네가 바로 내 고향일 줄이야 꿈엔들 꿈꾸었으랴. 이 일이 웬일일까. 이것이 꿈인가. 꿈 깨인 꿈인가. 미칠 듯한 나는 방금 네 속에 내 고향 보았노라. 천추(千秋)의 감격과 감사의 기적적 순간이여, 이윽고 벽력 같은 기적의 경이와 환희에 놀란 가슴 어루만지며, 침두(枕頭)에 세운 가야금 이끌어 타니, 오동나무에 봉(鳳)이 울고 뜰 앞에 학이 춤추는도다. 모두가 꿈이요, 꿈이 아니요, 꿈 깨니 또 꿈이요, 깨인 꿈도 꿈이로다.
만상이 적연히 부동한데 뜰에 나서 우러러보니 봉도 학도 간 곳 없고 드높은 하늘엔 별만 총총히 빛나고, 땅 위에는 신음하는 거위의 꿈만이 그윽하고 아름답게 깊었고녀-꿈은 깨어 무엇하리.
기거(起居) : 일정한 곳에서 일상생활을 함.
동정(動靜) : 행동이나 상황 등이 전개되는 낌새나 상태.
망우초(忘憂草) : 원추리. 백합과의 다년초로 뿌리는 한방 약재로 쓰이며, 근심을 잊게 해 준다는 이야기가 시경에서 유래. 이 글에서는 담배로 보면 무방할 듯.
천추(千秋) : 오래고 긴 세월.
침두(枕頭) : 베갯머리
적연(寂然) : 조용하고 쓸쓸함.
오상순(1894~1963)
시인. 호 공초(空超). 서울 출생. 일본 도시샤대학 종교철학과 졸업. 1920년 김억, 남궁벽, 염상섭 등과 함께 '폐허' 동인이 돼 작품 발표. 1956년 예술원상, 1962년 서울시 문화상 수상. '아시아의 마지막 밤 풍경', '첫날밤', '방랑의 마음' 등의 작품이 있음.
제목 그대로 10년 전부터 길러온 거위 한 쌍 가운데 한 마리가 죽자 남은 한 마리가 목메어 우는 모습을 보고 쓴 글이다. 어떤 사건에 자신의 소회를 담아 글로 쓰는 일이야 어지간히 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이 글처럼 작가의 허무를 절묘하게 문장에 담아 엮어 내기란 이만저만한 일이 아니다. 달 밝은 밤에 홀로 슬퍼하는 거위가 마치 작가와 한 몸인 양 비치는 느낌이라니. 아니, 글에다 자신의 온갖 심사를 실어 표출시키는 작가보다 한 마리 거위가 더 처연하게 다가오는 이미지라니. 지면 사정으로 생략된 전반부를 구해 꼭 하나의 글로 읽기를 권한다. 달밤의 고즈넉한 그 풍경을 더 맛보고 싶다면.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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