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면 천장에서 물이 새고 겨울에는 찬 바람을 막기도 쉽지 않던 낡은 한옥. 그래도 이귀순(41·여·대구 서구 비산2·3동) 씨 가족에겐 따뜻한 보금자리였는데…. 26일 집이 순식간에 불에 타 잿더미가 돼 버렸다. 몸만 무사할 뿐, 건질 만한 세간조차 남지 않았다.
이 씨는 시내 한 중학교에서 청소 일을 하며 집안을 홀로 책임지는 '여성 가장'이다. 금속가공 공장에서 일하던 남편은 5년 전 프레스기에 오른손가락 네 개가 잘린 뒤 일을 그만둬야 했다. 이후 전단지를 돌리고 파지를 주워 팔곤 했지만 손에 쥔 돈은 모두 술값으로 날려 버렸다.
이 씨는 남편(45)이 밉다. 툭 하면 술에 취해 자신에게 손찌검을 했지만 참았다. 애지중지하는 세 아들 영진(가명·13·중1)·태진(가명·12·초교 6년)·우진(가명·11·초교 5년)이에게 고함을 질러대던 것도 참았다. 하지만 술에 잔뜩 취해 집에 불이 나게 한 것은 눈감아주기 어렵다.
술을 마시지 않을 땐 조용하고 순한 남편. 하지만 술잔을 들었다 하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마셔댔다. 술에 취하면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다. 다른 사람에게 시비를 걸어 싸움을 벌이기 일쑤여서 이 씨의 애를 태웠다.
불이 난 26일도 남편은 술 냄새를 풍기며 집에 들어왔다. "술에 취해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기 시작했어요. 언제나 그렇듯 소나기는 피하자 싶어 아이들을 데리고 동네 놀이터를 찾았죠. 이젠 남편이 잠이 들었겠지 싶어 집에 돌아온 순간 맥이 빠졌습니다. 남편이 가스레인지를 잘못 만졌는지 불을 내 집을 다 태워버렸어요."
남편은 현재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지고 있다. 하지만 면회를 가고 싶은 생각도 나지 않는다. 맏이 영진이에게만 남편이 유치장 신세를 지고 있다고 알려줬다. 아직 어린 태진이와 우진이에겐 비밀로 했다. '아빠가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말해줬을 뿐이다.
전세 보증금 1천만 원짜리, 15평 남짓인 작고 허름한 집. 10여 년을 살며 정든 곳인데 눈 깜짝할 사이에 잿더미로 변했다. 학교 청소를 해주고 받는 월급(60만 원)으론 새 방을 구할 엄두도 낼 수 없다. 남편이 관리하던 은행 통장 잔고는 바닥. 더 이상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엎질러 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 어떻게든 살아남을 궁리를 해야 했지만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들 건사할 생각을 하니 앞이 막막했다. 급한 대로 아이들 외삼촌 집에 신세를 지기로 했다. 하지만 그 쪽도 형편이 넉넉지 못한 탓에 오래 있기 어렵다.
"빨리 살 곳을 구하지 못하면 가족이 따로 떨어져 지내야할 판입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모자원에 가려해도 맏이 영진이는 함께 입소할 수 없대요. 규정상 중학생이라서 안 된답니다. 그나마도 서너 달 밖에 있을 수 없다니 힘이 빠지네요."
이 씨에게 남은 희망은 아이들 뿐. 집안 형편은 어려웠지만 다들 구김살 없이 잘 자라줬다. 남들처럼 학원 한번 제대로 보내지 못했지만 방과 후 저소득가정 아이들을 위해 마련된 동네 공부방(날뫼 도서실)을 드나들면서 씩씩하게 지냈다.
평소 이 씨는 일을 마치면 공부방에 들러 아이들과 함께 집에 돌아오곤 했다. 하루 중 유일하게 마음 편하고 즐거운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젠 아이들 손을 잡고 공부방을 나서도 발걸음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아이들과 오순도순 지낼 방 한 칸도 없어서다.
"영진이는 중학생이 된 뒤 공부에 재미를 붙였어요. 학교에서 늦게까지 공부하다 돌아옵니다. 그 녀석을 보면서 저도 힘을 내곤 했는데….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커갈 텐데 방 한 칸 마련해줄 능력이 없는 제 자신이 원망스럽습니다."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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