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단일화 60·70] ②문단의 라이벌(상)

향촌동 시절부터 대구의 문화예술계를 주도했던 목우(牧牛) 백기만과 청마(靑馬) 유치환. 대구문단의 두 거목은 숙명적인 라이벌 관계였다. 목우와 청마는 우선 인생관부터가 서로 달랐다. 목우는 민족적이고 사상적이었다.

완고한 민족주의자로 민족을 저버린 문학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청마는 운명적인 의지의 시인이었다. 시인은 사상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감정을 말과 글로 녹여내는 언어의 조탁 능력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목우는 청마를 일종의 친일적인 색채에서 자유롭지 못한 시인으로 보았으며, 청마는 목우를 엄밀하게 말하면 시인이 아니라고 평가했다. 한 권의 시집도 남기지 못한 목우에 비해 청마는 많은 시집을 남겼고 상복(賞福)도 많았다.

5.16과 함께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 경북지부가 발족되면서 청마는 초대 지부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목우에게는 구혁신계라는 이유로 군사정권의 핍박을 받다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불우한 세월이 기다리고 있었다.

청마가 대구 문화예술계의 패권을 장악하며 자신의 시대를 열었지만, 목우는 오랜 실의와 좌절의 늪으로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러다 청마가 1964년 대구여고 교장을 마지막으로 대구를 떠나면서 두 사람의 시대도 막을 내렸다.

청마에 이어 30대 후반의 박양균 시인이 예총 경북지부장으로 등장하면서 대구 문화예술계의 지형도 다소 바뀌었다. 그러나 박양균-김성도-김춘수-이윤수-신동집-권기호-김원중으로 상징되는 대구문단 조류의 이면에는 목우와 청마가 남긴 해묵은 반목과 갈등의 여파가 흐르고 있었다.

어떤 측면에서는 역대 대구문협 회장 선거전이 목우와 청마계의 헤게모니 다툼이기도 했다. 청마의 핵심 참모였던 박양균은 김원중에게는 문학적인 스승이었다. 이윤수는 목우 계열의 토착문인이었다.

김춘수는 청마와 고향 선후배 사이었지만 서로가 마땅찮게 여기는 처지였다. 문학적인 기질과

성품이 서로 맞지 않았을 것이다. 신동집 또한 청마쪽 문인이기는 했지만 중도적인 입장이었고, 권기호는 김춘수의 제자였다.

아무튼 60,70년대 대구문단의 주역은 박양균과 신동집 그리고 김춘수였다. 이들은 한국문단이 주목했던 역량있는 향토의 시인이었다. 그만큼 삶과 문학에 있어서 개성도 뚜렷했다. 세사람은 맞수이기도 하고 더러는 적수이기도 했지만, 아주 가까운 사이이기도 했다.

특히 박양균과 신동집은 퍽 대조적이었다. 성격이나 기질은 물론 시적 경향도 완전히 달랐다. 박양균이 이지적이며 유리알같이 투명한 심상(心象)을 동원하는데 능한 시인이었다면, 신동집은 언어의 의미에 비중을 두고 내면성 탐구에 주력해온 왕성한 의욕의 시인이었다.

외형과 시풍이 닮아서 '한국의 장 콕토'로 불렸던 박양균은 냉철하고 깔끔한 이지적인 분위기 때문에 문단의 폭넓은 교류는 없었지만 제자들을 잘 돌보았다. 당시 김원중·박곤걸·서영수·장윤익·민경철 등 젊은 시인들이 그를 많이 따랐다. 그러나 술을 좋아하지 않아 주로 다방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스타일이었다.

김원중 시인은 "처음 대하는 사람은 차갑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정이 깊고 이해심이 많은 시인으로 보스 기질이 있었다"고 회고한다. 반면 신동집은 느슨한 데가 있어 술을 많이 마셨고 웃기도 잘했다.

신동집은 그러나 형편이 그리 어렵지 않았으면서도 술밥간에 주로 얻어먹는 편이었다. 그런 인색한 측면 때문인지, 신동집에게는 따르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다작(多作)과 과작(寡作) 논쟁으로도 대립했다.

신동집은 "다작하는 가운데 명작이 나온다"고 강조한 반면, 박양균은 "다작은 사기다"라고 혹평을 했다. 여기에다 김종길 시인까지 가세해 "시인은 '어설픈 시'를 내놓지 않는다"며 박양균 편을 들었다.

신동집은 대학에 재직하면서 시에만 전념, 대구에서는 가장 많은 20여권의 시집을 냈다. 반면 경북예총 지부장을 두차례나 지냈으며 공직생활에 몸담았고 사업에 몰두하기도 했던 박양균은 과작의 시인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시집 '빙하'가 제1회 현대문학상 최종 후보에 올라 박재삼 시인과 경쟁하기도 했다.

신동집은 74년 경북문협 지부장으로 나섰을 때 "박양균이는 두 번씩이나 했는데..."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라이벌 의식의 발로였다. 그러나 막상 문협 지부장을 맡고 나서는 그저 세월만 보내는 태도를 보였다. 애초에 문단 행정과는 무관한 사람이었다.

신동집은 김춘수 시인과도 소원한 관계였다. 직접적인 원인은 70년도에 있었던 제7대 경북문협 지부장 선출과정에서 김춘수가 자신을 소외시킨채 박양균에게 자리를 넘겨줬다는 오해에서 비롯됐다.

한번은 경북대 이재수 교수가 신동집에게 "니 시가 김춘수보다 못하다 카더라"고 은근히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러잖아도 김춘수가 밉살스럽던 터였다. 어느날 호수다방에서 김춘수·박양균과 등을 돌린채 앉아있던 신동집은 들으라는 듯이 일갈을 했다. "대구에 쥐포수 같은 놈 두 놈이 있어, 허허험..."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김춘수의 제자였던 당시 30대 초반의 권기호 시인 등이 술집에서 화해를 붙이기 위해 노력을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김춘수가 먼저 술잔을 권했으나 신동집은 술잔을 받지도 거절하지도 않은채 엄거주춤 앉아있을 따름이었다.

사실 세 사람 모두 이기주의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 유형은 달랐다. 박양균에게는 정치성향이, 신동집에게는 문인의 기질이, 김춘수에게는 학자적인 풍모가 강했다. "신동집은 감정적인 이기주의, 박양균은 기교적인 이기주의, 김춘수는 지적인 이기주의였다"고 비유하는 원로 문인도 있다. 그렇지만 김춘수가 문학적으로는 분명 한 수 위였음을 대구문단은 부인하지 않는다.

조향래기자 bulsaj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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