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미 후방기지 사령관으로서 남긴 불멸의 공훈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대구시민의 이름으로 이 공적비를 세우다." 대구 달서구 두류공원내에 외로이 서있는 E·J 메카우 소장 전공비에 새겨진 글귀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 피난민으로 넘쳐났던 기근과 혼란의 도시 대구에서 미군 사령관으로 1년여간 근무했던 메카우 장군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55년 3월 30일 시민과 부대원들이 현 대구 달성공원에 그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하지만 메카우 장군에 대한 더 상세한 기록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해마다 현충일이면 '통과의례'로 찾는 공무원들만 몇몇 보일 뿐. 그를'기리는' 노력은 50년이 넘도록 시도되지 않았다.
이라크 재건사업에 참여하는 자이툰 부대를 비롯, 소말리아·동티모르 등 세계 각국에 수천여 명의 젊은이들을 파견하는 한국. 하지만 한국전쟁을 전후해 우리를 위해 피와 땀을 흘렸던 외국인들의 '아름다운 뜻'을 기리는 현충시설 관리는 엉망이다.
메카우 소장 기념비는 1978년 우방랜드 자리로 옮겨졌고 1991년 우방랜드 착공 때는 지금의 두류공원 자리로 떠밀렸다.'찬밥 신세'를 거듭하던 메카우 장군 공덕비는 대구보훈청의 현충시설(대구 경북지역에 모두 242곳)로도 지정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대구 동구 검사동 K2 공군부대 내에 위치한 딘 헤스 대령 기념비는 지난 2002년에야 현충시설로 지정됐다. 그리고 이 때부터 그의 공적이 세상에 알려졌다.
헤스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 공군대령. 1950년 7월 초부터 51년 5월 말까지 250여 회나 출격했던 그의 전투기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쓴'신념의 조인'(信念의 鳥人)이라는 단어가 새겨졌다.
이같은 무훈보다 더 숭고했던 건 한국의 전쟁고아에 대한 진실한 사랑. 그는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 수송기에 갈 곳 없는 907명의 한국전쟁 고아를 실어 제주도에 옮겼고, 일본에서 식량을 들여 와 고아들을 돌봤다. 헤스 대령 기념비는 가로 세로 단 1㎡에 불과하지만 그가 남긴 공적만큼은 우리 가슴 속에 영원히 숨쉬게 된 것.
한국전쟁 당시 UN 인도 대표로 참가, 39살의 나이에 낙동강 전선에서 지뢰폭발로 숨진 나야 대령의 기념비(대구 수성구 범어동 소재)도 지난 2003년엔 현충시설로 뒤늦게 지정됐다. 수십년간 잊혀졌던 나야 대령이 뒤늦게 빛을 본 것.
한 재향군인은"우리도 국제 사회 곳곳의 분쟁지역에서 평화를 심는 노력을 하고 있는 마당에 우리를 도와준 외국인들을 이토록 함부로 대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라 했다.
이상준기자 all4you@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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