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역사적 숙제는 세 마디로 말할 수 있다. 하나는 통일정신이요 하나는 독립정신이요 또 하나는 신앙정신이다. 그리고 이 셋은 결국 하나다. 나는 우리 역사가 고난의 역사라고 보는데, 그렇게 보면 세계 어느 민족의 역사나 고난의 역사 아닌 것 없고, 인류 역사가 결국 고난의 역사지만, 그중에서도 우리 역사는 고난 중에서도 그 주연(主演)으로 보는데, 그 고난의 까닭은 이 세 가지 문제에 있다.
5000년 역사의 내리밀림이 이조 500년인데 그것은 그저 당파싸움으로 그쳤다. 아무도 이 당파싸움의 심리를 모르고는 우리나라 역사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이 500년의 참혹한 고난은 이 한 점에 몰린다. 그러므로 문제는 하나 되는 데 있다. 민족으로 당하는 모든 고난, 그 원인이 우리 잘못에 있든 남의 야심에 있든 그 뜻은 작은 생각 버리고 크게 하나 돼 봐라 하는 하나님의 교훈으로 역사의 명령으로 알아야만 우리는 역사적 민족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 되지 못하는 원인을 찾으면 독립하지 못하는 데, 제 노릇하지 못하는 데 있다.
하나 됨은 남의 인격을 존중해서만 될 수 있는 일인데 남의 인격을 아는 것은 내가 인격적으로 서고야 될 일이다. 정말 제 노릇 하는 사람은 제가 제 노릇 할 뿐 아니라 남을 제 노릇이도록 만든다. 거지에게도 자존심은 있다. 인격은 곧 자존이다. 스스로 높임(自尊)이 스스로 있음(自存)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독립정신이 부족하다는 말은 스스로 비위에 거슬리는 말이지만 남이 되어서 볼 때, 아니라 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본에 손을 내민 백제의 일이 그것이요, 고려도 그것이요, 이조는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지리적 조건에 핑계를 대면 댈 수도 있고 주위 민족의 탓을 하려면 할 수도 있지만 인격엔 핑계가 없다. 핑계 되는 그것이 그 정신 아닌가? 우주를 등에 지는 것이 인생이요 정신이지, 나 밖의 다른 책임자를 찾는 것은 역사를 낳는 인격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어려운 지리적 역사적 환경조차도 역사적 의지가 우리에게 명하는 "너는 역사의 주인이 돼 봐라." 하는 숙제로 알아야만 이긴 자가 될 수 있다.
함석헌(1901~1989)
종교인·사상가·사회운동가. 평안북도 용천 출생. 오산학교와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졸업.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10여 년 간 교직생활. 광복 후 평북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을 지낸 뒤 월남. 1956년부터 사상계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펴나가기 시작했고 1970년 씨알의 소리 창간. 한일협정 반대 단식, 군사정권 및 독재 반대 투쟁, 민권운동 등을 계속. 1979년과 1985년 노벨평화상 후보에 추천. 제1회 인촌상 수상. 저서에 '뜻으로 본 한국 역사', '수평선 너머' 등 다수.
요즘 세상은 혼탁하다. 옆을 돌아보기 두려울 정도로 어지럽다. 잘난 척 하는 이, 그럴 듯한 말은 쏟아지지만 정신의 지표는 찾기가 힘들다. 그래서인가, 우리 시대의 위대한 사상가 함석헌 선생의 글들은 읽을 때마다 새롭다. 정신을 맑게 해 준다. 그 중에서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은 역사를 읽고, 세상을 보고, 미래를 가늠하는 이정표로 삼을 만하다. 자유당 정권을 통렬히 비판한 이 글로 선생은 투옥됐지만, 읽는 이들의 가슴은 얼마나 시원했을까. 명쾌한 논리를 아름다운 우리말로 정확한 표현해내는 선생의 힘은 놀랍다. 정신과 양심과 실천에서 빚어진 것이라 더욱 감탄스럽다. '뜻 품으면 사람, 뜻 없으면 사람 아니다. 뜻 깨달으면 얼, 못 깨달으면 흙. 전쟁을 치르고도 뜻도 모르면 개요 돼지다. 영원히 멍에를 메고 맷돌질을 하는 당나귀다.'라고 외치는 선생의 뜻은 또 얼마나 맑은가.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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