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경옥입니다] 세월이 약이라구요?

신록(新綠)에 눈이 초록빛깔로 물들여질것만 같다. 가을단풍은 쓸쓸하면서도 고혹적이지만, 이맘때의 신록은 까닭없이 사람 가슴을 설레이게 한다. 그중에서도 감나무잎을 보면 샘이 날 정도다. 우린 한 해가 다르게 잔주름이 늘고 파삭해지는데 고것들은 참기름을 바른 듯 어찌나 반질반질 윤기가 나는지.

1년 열두달에 나이를 매긴다면 유월은 한창 물오른 청춘의 달일 것 같다. 꾸미지 않아도,화장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싱싱하고 화사한 달.

이런 유월이 우리 한국인에게는 유난히 가슴 아픈 달이기도 하다. 해마다 이즈음이면 어김없이 신문과 방송에는 국립묘지의 묘비 앞에서 흐느끼는 사람들의 모습이 실린다. 이젠 눈물샘도 거진 말랐을법한 주름투성이 할머니들이 그토록 슬픔에 겨워하는 모습을 볼때면 가슴이 찡하니 아려온다. 세월만한 약이 없다고들 말하지만, 아무리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슬픔이 있음을 보게 된다.

반세기 전의 전쟁이 남긴 것은 아물지 않는 상처다. 수백만의 새파란 젊은이들이 광풍 속의 꽃잎처럼 떨어졌다. 다행히 사선(死線)을 넘어 돌아온 이들도 이런저런 후유증으로 피폐해져 갔다. 전쟁통에 북녘 고향을 떠나와야 했던 사람들은 또 얼마인가.

상처는 또한 그리움이다. 이제는 모습조차 가물가물하지만 언젠가의 말 한마디, 웃음소리 한 자락, 한숨소리마저 기억의 설합 속에 고이 담겨져 있다. 어느 시인은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고 하던데 돌이킬 수 없는 그리움을 안고 평생을 산다는건 참으로 얼마나 시름겨운 삶일 것인가.

20세기의 성자로 일컬어지는 인도의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말했다."기쁜 마음은 약이 되지만 상한 영혼은 뼈를 말린다"고. 깊은 그리움은 영혼을 상하게 만든다. "꼭 돌아오겠노라"며 웃는 얼굴로 길 떠났던 사랑하는 이들, 그들에 대한 기억이 그 한 순간에 정지돼 버린 사람들에겐 채워지지 않는 빈 자리가 뼈 말리는 고통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유월의 숲에서 박하 향내가 짙어진다. 야누스의 두 얼굴같은 이 계절에 다시금 되뇌어 본다. 그리워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언제든 볼 수 있고, 언제든 목소리 들을 수 있는 지금이 얼마나 큰 감사의 조건인가, 하고.

전경옥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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