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걸핏하면 '내 탓'보다는 '남의 탓' 타령이다. 지체 높은 정치지도자일수록 더 그런 것 같다. 더구나 최고지도자가 백성들이 돌아섰는데도 자신을 겸허하게 들여다보기는커녕 되레 그런 사람들을 탓하는 모습은 볼썽사납다.
지난 5·31 지방선거 때 '자기 편'의 표가 거덜 나 버린 상황에서도 그런 현상은 예외가 아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궤변과 '남의 탓'을 서슴지 않는가 하면, 원망마저 자제하지 않았다. 같은 배를 탄 정치인들 역시 별반 다르지는 않으나, 다소 달라지는 조짐들을 보여 그나마 그 추이를 지켜보게 한다.
집권 여당 내부에서도 삐걱대는 소리가 난다. 대통령과 여당 새 의장 사이의 엇박자, 서로 '제 길 가기'도 모양새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오죽하면 같은 당의 초선의원들이 청와대와 주도세력을 향해 '친북·반미·언론법·사학법은 진보·개혁이 아니다'라는 등의 강도 높은 비판을 하면서 주문까지 쏟아냈을까.
대통령은 이번 선거 이후 '저항 없는 개혁은 없다'고 했다. 그 '심판'을 되레 깎아 내리면서 '위험하다'고도 했다. 백성들이 개혁 정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위험한 상태라는 논리였다. 민심은 말할 것도 없고, 김 의장마저 그저께 독선 가능성을 지적했지만, 아무래도 그런 느낌이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도 최근 현 정부는 여러 문제를 과거 정권 탓으로 돌리려 할 뿐 별로 한 일이 없다는 쓴소리를 했다.
이런 우려의 와중에 여당의 새 의장과 초선의원들이 대통령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데 일말의 희망을 가져도 좋을는지, 아직은 잘 모를 일이다. 내일로 예정됐던 대통령 국회 연설이 돌연 취소되고, 대통령이 밀고 나가려는 부동산·교육 개혁에 변수가 생길 가능성을 보이는 건 그 조짐의 일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 앞에 진정으로 겸허해지는 대통령의 모습은 여전히 안 보여 안타깝다.
조선조 때도 국가 통치 이념에 차질과 의심이 생기면 직간(直諫)이 들어갔다. 임금은 그런 소리에 귀를 막거나 거스르려 하지는 않고 감싸 안곤 했다. 오늘날로 치면 '민주 정치' '옳은 정치'로 돌아가자는 백성의 소리 같은 데 큰 무리가 없는 한, 당시에도 그대로 먹혀들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임금에게는 옳은 정치를 펼치려는 정치인들이 힘을 실어주고 보탰으며, 적극 받들었다.
현군에다 선비다웠던 세종은 7년 가뭄 때 백성과 함께 고생하기 위해 주로 경회루 앞 초가삼간에서 지낸 바 있다. 세금을 결정할 때는 세 번 정도나 전국적인 여론 조사를 했고, 찬성하는 고을부터 세금을 거둘 정도로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받아들였다.
미국 대통령 링컨도 비슷한 경우다. 그는 한 표를 얻기 위해 짐을 날라주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서슴없이 땀 흘리며 짐을 날라다 주었다. 링컨의 이 같은 자세 낮추기는 백성들을 상전으로 여겼던 탓이었을 게다. 한 표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안다는 건 그만큼 국민의 마음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신분이 극과 극인 케네디 대통령도 그를 닮으려 했는지 모른다.
조선조의 임금은 차치하더라도, 재상의 능력을 재는 데도 세 가지 잣대가 있었다. 가장 큰 잣대는 '아량'이었다. 둘째가 '바른 소리', 그 다음은 '청렴'이었다. 임금은 이런 덕목들을 갖춘 재상들 덕분에 그 시대의 현군(賢君)으로 칭송될 수 있었으며, 여러 일화에도 그런 사실들이 잘 나타나 있다.
세종 때의 황희는 도량이 넓었으며, 노비 아이들까지 친자식처럼 생각했다고 한다. 심지어 여자 종이 빈정대도 껄껄 웃어넘길 정도였던 모양이다. 재상 허주도 늘 임금에게 극간해 정도를 밟게 했다. 청백리로 흠모를 받던 유관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세종이 빈소에서 체통도 잊은 채 엉엉 울었다고 한다.
오늘의 정치판을 보면, 독단이나 독선과는 담을 쌓은 채 백성의 소리에 귀를 열고 그들을 감싸 안았던 옛날의 훌륭한 정치지도자들이 아량이 그립다. 대통령과 여당 지도부는 초선의원들의 주장과 비판만 제대로 받아들이더라도 달라지게 되지 않을까.
이태수 논설주간 tspoe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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