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영진의 대구이야기] (26)재벌들의 창업시절

해방직후의 대구경제는 그 전도가 극히 암담했건만 한없이 척박한 토양아래에서 역설적이게도 미래의 재벌들이 움트고 있었다. 대구에서 기업을 일으켜 재벌이 된 대표적인 인물이 삼성그룹의 고 이병철회장이다. 1946년 10월18일자 '대구시보'에는 이런 사고(社告)가 실렸다.

장인환(張仁煥. 초대 경북지사. 납북)사장 밑에서 부사장직을 맡게 된 여상원은 뒷날 1.2.3공 시절의 정통 '대구일보' 사장과, 대구상의 회장, 동신섬유사장을 지내는 대구의 이름난 경제인이다. 한석동은 대구의 현직 변호사였다. 이 두 사람과 더불어 이병철 회장이 그의 전공분야라 할 '경리'에서 '기획'분야의 신문사 간부가 된 것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그는 이 무렵 대구에서 주로 건어물을 수출하는 '삼성상회'를 운영하는 한편, '월계관'이란 상표를 단 청주 전문의 조선양조회사를 꾸려가고 있던 재력가였다. 따라서 이재만을 주목적으로 신문업에 발 들여 놓았다기보다, 장 사장과 여 부사장, 그 자신 등, 대구의 아홉 유지들이 모여 만든 '을유회'(乙酉會)원들의 권유에 따라 투자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한 셈이었다. 그러나 이 때의 짧은 언론경험이 뒷날 중앙메스컴을 갖게 된 동기가 된듯하다. 이듬해 5월 그는 삼성의 기반을 서울로 옮겨, 전국적인 기업으로 도약한다. 이 때 가담한 부사장이 효성(曉星)그룹의 창업주가 되는 조홍제(趙洪濟) 회장이다.

해방직후의 대구에서 가장 역동적인 정치활동을 편 기업인은 뒷날 쌍용그룹의 창업주가 되는 고 김성곤(金成坤)회장이다. 해방직전부터 칠성정에서 소규모 비누제조업체인 삼공(三共)합자회사를 운영하며 재력을 키운 그는 해방직후 경북건국준비위원회의 재정부장직에 오르면서 좌익진영과 깊이 어울렸다. 이후 그는 경북청년회 부회장, 영남체육회 이사장, 대구무술회장 등도 맡지만 인민당대구지부 상무위원과 '민주주의민족전선' 대구시위원 등 좌익정치단체의 요직도 갖는다. 이 때의 행적이 걸림돌이 된 적도 있으나 3공 시절엔 한때 정. 재계의 강자로 발돋움하기도 한다.

일본에서 광고모자와 피복제조로 한밑천을 잡았던 코오롱 그룹 창업주 고 이원만(李源万)회장은 해방직후 대구에서 우익정당인 한민당경북도당의 재정부장직을 맡으면서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경북기업주식회사를 경영하며 고급직물인 '뉴똥'을 생산, 톡톡히 재미를 보기도 한다. 그러나 정치활동에 몰두한 탓에 아들인 이동찬(李東燦) 2대회장이 사실상 그룹의 기틀을 다져나왔다. 나일론제조기술을 최초로 도입해 재계의 새별로 떠오른 50년대 말부터 재벌의 면모를 갖추었다.

연료에너지 분야의 국내 최강자가 된 대성그룹 창업주 고 김수근(金壽根)회장은 1947년 대구 칠성정에서 종업원 3명에 대지 50평의 구멍가게식 연탄공장을 시작으로 '대성산업공사'를 키웠다. 당시 가정연료는 장작이 아니면 마른 솔잎 정도였다. 이런 화목류(火木類) 연료가 장차 연탄으로 대체될 걸로 확신한 그는 오로지 연탄산업에만 몰두했다. 연탄업은 생산과 배달과정에 탄가루를 뒤집어쓰는 막노동사업이다. 그럼에도 긴 안목에서 사업의 잠재력과 연료보국에의 가치를 남달리 간파한 그는 에너지재벌이 되는 먼 훗날까지 손수 연탄을 찍어 팔던 초심에서 벗어나지 않고 한 우물을 파게 된다.

다들 그 시작은 빈약했으나 황무지에서 라일락을 꽃피우듯 결과는 장대했다. 재벌가와 정치권력은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한 것이 한국적 현실이다. 그러나 재계 랭킹에 연연하기보다 정치와는 가급적 멀리한 재벌일수록 뒤 끝이 편했던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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