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여주IC에서 내려 공방 무토(撫土)를 찾았다. "찾아 오느라 욕봤다."며 반갑게 맞는 이가 '투각의 달인'으로 불리는 무토 전성근(全成根·47) 씨. 흙을 어루만진다는 뜻인 '무토'가 그의 호이자 공방의 이름이다.
사람을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는 전 씨는 일견(一見) 장난기 가득한 어린이 같다. 하지만 조각 칼을 잡으면 그는 달라진다. 마치 신들린 듯 칼이 춤을 춘다. 반건조된 도자 위에 밑그림조차 없이 바로 칼을 들이댄다. 그리는 순서도 남들과 다르다. 사람이라면 코와 눈을 먼저 그리는 것이 보통인데 그는 눈썹부터 그린다. 모란 동백 포도 새 용 호랑이 물고기…. 지켜보는 이들의 눈이 커지고, 입이 딱 벌어진다.
이런 그를 도예계에서는 '대가'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우관호 홍익대 도예유리과 교수는 "400~500년 뒤에 무토의 백자 투각 필통 한 점이 수억 원을 호가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박석우 상명예술디자인대학원 교수는 "그의 손 끝에서 떨어져 나온 작품은 살아 있다. 조각하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쓰는 듯하다."고 극찬했다.
경북 고령군 쌍림면 신촌이 고향인 무토는 중졸 학력이 전부다. 화가가 되고 싶었던 그는 먹고 사는 방편으로 나무 조각을 거쳐 도자기로 전공을 바꿨지만 그림도 조각도 누군가에게 배운 적이 없다. 굳이 스승을 꼽으라면 자연이다. 깡촌에서 산과 들로 뛰어다니며 눈에 보이는 자연을 관찰하는 눈이 그에게 있었다. 덕분에 바로 칼을 들이대도 눈 앞에 놓고 조각한 듯 꽃 잎의 수와 모양, 물고기 지느러미의 수 등이 정확하다. 배우지 않았기에 또한 자유롭다.
부산에서 불교조각, 건축조각 일을 하다가 여주로 와서 도자기에 손 댄 것은 20여 년 전인 1987년. 나무에 하던 조각을 흙으로 바꿨을 뿐이다. 숙련된 나무 조각 기술이 있기에 대가가 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그의 백자 투각 소품이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팔렸다. 살아 있는 아시아 작가의 도자기 작품이 경매에 붙여진 것은 드문 일이다. 또 그의 공방은 일본, 미국 등지 도자기 작가들이 한국에 오면 반드시 찾는 투어 코스에 들어가 있다. 투각, 특히 각이 살아 있는 이중투각 작품을 구경하기가 쉽지 않아서이다.
중졸 학력이 전부지만 그는 대학 강단에 선다. 서울대 단국대 홍익대…. 투각을 하는 유일하다시피한 작가여서 강의해달라는 요청을 자주 받는다. 이론에 앞서 칼을 다루는 법을 얘기하면 학생들이 금방 그의 강의에 몰두한다고. 서울 인사동에서도 무토는 단연 인기다. 그는 "가끔 인사동에 가는데 안주 서비스가 자주 나온다."며 즐거워했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 온 교수가 만난지 3일만에 형으로 모시겠다고 했어요. 그는 제 인격이 아니라 제 작품을 보고 형으로 삼았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성공했고 유명한 작가이지만 그는 가난하다.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20여 명의 고객이 있고, 생활도자기를 만드는 업체 4군데를 도와 푼돈을 벌지만 넉넉하지 않다. 그는 "도예가는 돈 버는 직업이 아니다."면서 "예술가의 94%가 영세민이라고 하는데 저 역시 영세민에 속한다."고 했다.
그의 꿈은 하나다. 한국도자기를 만드는 것. "고려청자, 조선백자는 있어도 '한국도자기'는 없습니다. 제가 죽고 난 뒤 제가 만든 도자기가 한국도자기로 불렸으면 좋겠습니다."
서울과 미국 등지에서 전시회를 했지만 대구·경북에서 전시회를 하지 못해 고향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는 늘 고향을 생각한다. 성주댐 안쪽 조용한 곳에 공방을 만들어 작품 활동을 하며 살고 싶어 한다. 조만간 대구에서 전시회도 가져 볼 생각이다.
긴 시간 동안 인터뷰를 마치고 떠나려는 취재진을 무토가 잡았다. 자고 가든지 그게 어렵다면 저녁이라도 먹고 가라는 것. 영락없이 사람 좋은 촌사람이다.
최재왕 서울정치팀장 jwchoi@msnet.co.kr
※ 투각(透刻)이란? 나무나 도자기 따위의 재료를 앞면에서 뒷면까지 완전히 파서 모양을 나타내는 조각의 한 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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