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시내 가는 길에 범어로타리를 지나게 되었다. 옆 차선은 잘도 가는데, 1차선 차들이 밀렸다. 창밖을 내다보니 두 사람이 차를 세워두고 언성을 높이는 것같았다. 조그만 접촉 사고 같았다. 큰 사고라면 어디 소리 지를 겨를이라도 있겠는가? 요즘 들어 정말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IMF 이전에만 해도, 길 가운데 차를 세우고 서로 잘했다고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요즘엔 이런 광경을 보기가 드물다. 아마도 이제는 우리나라도 도덕적 인프라가 형성되는 모양이다.
어쨌든 한편은 왜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은 서로 잘못한 것인데 왜 내가 미안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하긴 그렇다. "sorry!"를 늘 입에 달고 사는 서양 사람들도 교통사고가 나면 결코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들은 것같다. 미안하다, 죄송하다는 것은 도덕적 차원에서나 하는 말이다. 그러나 똑같은 말이 법정에 가면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요, 결국 범법을 자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덕적 문제인줄 알고 "미안하다"고 했다가, 법정에 가게 되면 법적 책임을 져야하며, 법적 가해자가 된다. 사실 단순히 도덕적으로 미안한 일들이 "법대로 합시다"로 끝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미안하다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도덕과 법의 경계선을 잃어버리고 당황하고 있는 셈이다.
법의 그리스어는 노모스(nomos)이다. 노모스는 나누어준다는 뜻을 가진 동사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고대사회에서 토지를 나누어준다는 뜻에서 유래한 것같다. 토지는 의식주의 기반이므로, 이를 나누어주는 어떤 기준이나 규칙, 규율은 곧 생명의 기초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 와서 나의 토지를 멋대로 차지한다거나, 큰 비가 와서 경계가 무너지면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노모스는 모두가 그렇게 행하고 또 따르는 질서, 풍습, 규범을 의미하기도 하며, 결국에는 그 누구의 싸움도 해결해야 하는 법으로 우뚝 서게 된다.
또한 그리스 시인 핀다로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노모스는 모든 인간과 신들의 왕이다." 즉 노모스는 원래 왕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왕은 한 나라를 다스리고 관리하는 자이므로, 싸움을 심판하고 멈추게 했다. 그런데 복잡한 인간사에서 싸움이 어디 차례로 일어나고 또 왕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는가? 동시에 여러 곳에서 싸움이 터지면, 왕이 다 심판할 수 없다. 그래서 왕의 이름으로 대신 보낸 것이 "노모스"라고도 한다. 결국 노모스의 의미대로라면, 나눔의 질서가 법이 된 것이다. 나눔의 도덕이 법이 되었다. 분쟁이나 소유를 나누어주는 왕이 법이 된 것이다.
법 앞에서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이제 두 부류인 것같다. 법대로 하자는 사람과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은 그야말로 도의적 차원에서도 얼마든지 나누어가지며 살 수 있는 사람이다. 법대로 하자는 사람은 법이 강제로 나누어주지 않는 한은 모두 자신의 것이요, 자신의 한 일이 다 옳다는 사람이다. 그런데 법대로 하자는 사람 앞에서 어떻게 도덕적으로 미안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 옛날 사람들의 살아가는 싸움을 종식시키는 왕이 법이 되었다면, 법대로 하자는 사람은 전권을 가진 왕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다. 따라서 법대로 하자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사회는 강력한 권력을 필요로 한다. 강력한 권력이 없으면 그야말로 법을 법대로 집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 많을수록, 사실 그 사회는 상식적 기반을 필요로 한다. 모두에게 두루 통용되고, 누구나 이해하는 상식 없이는 도덕적 인간만이 나눔의 장터에서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법과 도덕의 경계선에서 당황하며 살고 있다. 모든 것을 법대로 하자니 강력한 권력의 탄생이 두렵고, 법 없이도 살자니 자본주의의 장터에서 끝까지 손해만 봐야 한다. 그러나 법의 원초적 정신도 삶의 터전을 나누는 것이요, 도덕의 근본적 목적도 모두 함께 잘 사는 것이다. 법대로 하자는 사람과 법 없이도 사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면, 국가적 발전을 위해 나눔을 미루자는 말을 거두어야 할 것이다. 도덕과 상식 위에 왕과 같이 군림하는 법도 결국에는 나눔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신창석 대구가톨릭대 철학과 교수
댓글 많은 뉴스
"재산 70억 주진우가 2억 김민석 심판?…자신 있나" 與박선원 반박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김민석 "벌거벗겨진 것 같다는 아내, 눈에 실핏줄 터졌다"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