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무렵 집에 식구가 없을 때가 가끔 있다. 미리 연락이 되면 저녁식사는 직장 근처의 식당에서 먹게 된다. 하지만 연락 받지도 못하고 텅 빈 집에 들어가야 하는 날들이 있다. 사람이 없는 집의 기운은 말 그대로 텅텅 빈 느낌이다.
누군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문을 열었을 때 인기척이 없으면 가구도 그렇고 벽도 시큰둥하다. 들어오는 사람을 힐끔 보고 다시 가구처럼 벽처럼 팔짱을 끼고 제 안으로 들어가버린다. 그런 날은 대체로 라면 따위가 저녁밥이다.
하지만 라면도 끓여먹기 싫을 때가 있다. 중국집 전화번호조차 알지 못하면 말끔하게 정리된 집이라도 그 희멀건 꼴이 얄밉고 청소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약간씩 건짜증이 나게 마련이다. 오래된 습관인 저녁을 먹지 않을 수는 없고 해서 집을 나와 식당을 찾아보지만 차를 끌고 가기는 싫고 점점 짜증이 더해진다. 그럴 때 오뎅과 호떡과 떡볶이를 파는 포장마차는 정답처럼 딱이다.
그날도 나는 아무 연락도 받지 못한 채 빈 집에 들어왔다가 집 밖으로 나왔다. 뭘 먹지 궁리하다 마주친 포장마차에서 오뎅과 호떡을 습관처럼 그냥 꾸역꾸역 입 안에 밀어넣어 삼키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친다. 올해 대학에 들어간 아들녀석이 "아빠 뭐해?" 말을 건넨다.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들 혼자라도 약간 멋쩍을 장면인데, 그 녀석의 친구 넷이 나를 포위하듯 서 있다. "과 친구들이야." 참으로 난감한 처지였다. 모른 척 지나가지. 포장마차에서 오뎅과 호떡을 먹을 수 있는 한계 나이는 얼마일까.
열 살 아래는 포장마차 이용이 버거울 터. 스무 살 이하라면 아무 부담도 없을터이고, 스무살에서 서른 살이라면 누군가 동행이 있어야 할 것이고, 서른 살 넘으면 조금 주저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나이에 혼자 포장마차에서 아이들처럼 군것질을 하다니.
하기야 그게 내 저녁이란 걸 아이들이 알았다면 더욱 창피했을게다. 아마도 나는 체면에 대한 생각을 먼저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익명성이 보장되었기에 그곳에서 대충 시장기를 해결하려는데 포장마차 한계 나이를 훌쩍 넘어버린 중년의 아비를 아는 척 하는 이 녀석의 속셈이란 도대체 뭐냐.
나를 쳐다보는 아들 친구 녀석들이 꾸벅 절을 한다. "안녕하십니까." 모두들 건장하고 어른을 마주하는 어려움이 없다. 당당하다. 입안에 가득 급하게 떠밀어 넣은 호떡 한 조각이 뜨겁다. "응응."
인사를 하는 녀석들은 그게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내 지레짐작일까. "너희들도 먹을래. 아닙니다, 저녁 방금 먹었어요." 차라리 걔들이 같이 오뎅과 호떡을 먹었다면 같은 공간 속에서 내 쑥스러움은 조금 사라졌겠지만 더욱 나는 멋적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인사를 하고 떠났다. 다른 장소 이를테면 그럴듯한 식당이나 레스토랑에서 얘들을 만났다면 계산을 대신 해주면서 아버지를 증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필이란 말만이 입 속을 맴돌았다. 시장기 대신 뭔가 당했다는 느낌만이 가득했다.
집에 돌아와서 사진첩을 꺼내 아버지의 사진을 찾아보았다. 지금 나보다 훨씬 젊은 아버지! 면도자국이 아직도 파리한 얼굴은 30대의 얼굴이다. 아버지는 내가 13세, 당신이 38세에 돌아가셨다.
성장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갈증은 점점 커졌다가 서른 살이 넘으면서 아이들이 자라면서 마침내 나는 아버지를 찾지 않게 되었다. 내가 아버지가 되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내 속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아들과 아버지가 겹친다는 의미이다. 13세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산소는 집 옆의 산이었는데 대청마루에서 보면 뻔히 짐작하는 거리였다. 당연히 아버지는 나에게 억압이었다.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중달을 쫒는다는 고사가 생각나는 어린 시절이었다.
지금의 내 아들 속의 아버지는 완성되지 않은 아버지이다. 그가 조금 더 아들이다가 아버지가 되어야 아버지의 이미지는 완성되리라.
송재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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