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3시, 열대야(熱帶夜)의 선잠에서 깨어난 구보 씨는 의자에 멍하니 앉아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를 듣는다. 컴퓨터의 모니터 가장자리에 다닥 붙여둔 포스트 잇이 바람에 희미하게 흔들린다.
어둠 속 형광빛 종이 조각, 나비 날개처럼 파닥이는, 마치 프루프록의 연가처럼, '내가 핀에 박혀 벽 위에서 꿈틀거릴 때'처럼, 마치 내가 나를 불러대는 듯 저 작은 것들,
구보 씨는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 전기 스위치를 올린다. 불이 탁 켜진다. 부신 눈을 비비며 컴퓨터로 가 엉거주춤 포스트 잇에 휘갈겨 쓴 글자들을 하나씩 들여다보고 소리내어 읽는다. '내 머리 속에는 방대한 세계가 도사리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그것을 망가뜨리지 않고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인가?' 카프카의 잠언이다.
어제 낮 누가 구보 씨에게 물었다. 그 사람과는 왜 그렇게 불화한 거요. 구보 씨는 카프카를 흉내내어 대답했다. '문학이 아닌 것은 모두 날 지루하게 하오.' 그때 베껴 둔 것이다. 옆의 분홍 종이 조각에는 '아주 먼 곳에 있는 나라들 간의 휴전(休戰)'이라고 씌어져 있다.
먼나라에서 아주 멀고 중동이라고 불리는 곳(사실은 먼나라의 서쪽에 있지만 더 먼 곳에 있는 잘 사는 나라들 식으로 '중동'으로 불리는)의 두 나라 간에 벌어진 일종의 종교전쟁인데 며칠 전에 극적으로 휴전이 타결되었다는 속보를 써둔 것이다. 그 옆에 '상량식(上梁式)'이라 적힌 푸른 종이가 팔락인다.
속보가 있던 다음날 구보 씨는 깊은 산 속에 있는 절의 상량식에 참석을 했던 것인데, 엉겁결에 좋아하는 지인(知人)들을 따라가 수도 없이 많은 결례를 저지른 것이 참으로 후회가 되어 그날 밤은 잠도 설쳤던 것인데, 그 옆에는 또 '땀과 아우라(Aura) 그리고 평화'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 있다.
사원 마룻대의 축문을 위해 천리 길도 마다 않고 도포 차림으로 차를 몰고 온 청학동 선비, 인부들과 같이 목재를 나르던 스님 그리고 팥죽 같은 땀을 흘리며 걸레를 들고 마루를 닦고 푸성귀를 뜯어와 상을 차리고 뒤처리까지 말끔하게 하던 CEO. 평소 자신은 다신교(多神敎) 성향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해대던 구보 씨가 숙연해져 이것이 바로 '궁극의 아우라'라고 그때 느낀 걸 잠 안 오던 그날 밤에 써둔 것이다.
'이분법이 사라지는 곳에 낙원이 있다.''광폭한 사랑에 휩싸여 있을 때, 언어 자체를 비명지르고, 더듬고, 비틀거리고, 웅얼거리게 만드는 것이 문체다.' 마치 서낭당 금줄에 꽂아 둔 소원구(所願句)들처럼 모니터에 매달린 노랗거나 붉고 푸른 종이 조각들을 보며 구보 씨는 온갖 생각에 잠겨 또 밤을 새운다.
마치 어릴 적 눈감고 사전을 뒤적여 글자를 찍던 놀이나 지구본을 돌려 손가락으로 나라와 도시를 짚으며 놀던 때처럼. 시계침은 새벽 다섯시 사십분을 가리키고 있다.
박미영(시인·대구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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