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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진의 대구이야기] (47)정겨운 옛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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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광장'에 모여 토론을 즐긴 서구와는 달리, 우리는 일찍부터 '골목'을 이웃간의 담소와 사교의 장(場)으로 삼아왔다. 골목에서 뛰고 자란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골목대장시절을 못 잊어 했고, 어른들은 골목의 악소문을 가장 두려워했다.

영남 제일의 성읍(城邑)도시로 커온 대구는 정겨운 옛 골목이 유난히 많은데다 재미있는 이름을 지닌 골목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또 서울처럼 행세하는 대갓집들에 막혀버린 '막다른 골목'이 드물며, 골목과 골목이 사통팔달로 이어져, 성내 어디에도 다다를 수 있는 것이 대구골목의 특징이 되었다.

남성로의 별칭인 '약전골목'은 왕복 2차선도로여서 골목이라기보다 '약전거리'란 말이 제격이다. '긴 골목'의 대구식 표현인 '진골목'은 약전골목과 종로가 맞닿는 길의 우측에서 꺾어져 남일동 중앙시네마까지 이르는 길이다.

일제 때 이 곳엔 달성 서씨 부자들이, 해방 직후엔 이원만 코오롱 그룹 창업주가, 그리고 자유당시절엔 신도환 반공청년단장이 중소기업 사장들과 함께 산, 대구의 부유층 동네였다. 이 바람에 10.1사건이나 4.19와 같은 소요사태라도 나면 몰려온 시위대로 곤욕을 치른 곳이기도 했다.

서성로 1가에는 아예 '돈부자골목'도 있었다. 일제 때 현찰이 많기로 소문난 한 부자가 돈놀이를 하며 큰 집에 살고 있어, 가난한 사람들이 비꼬아서 부른 것이 골목이름이 되었다. '회나무골목'은 금호호텔 건너편에서 현 희도아파트 서쪽 담까지로, 실연한 기생이 목 메어 죽은 오래된 회나무가 한 그루 있어, 지어진 이름이었다. 이 골목의 바로 곁골목은 골목 가에 오동나무 밭이 있다고 '오동나무골목'이라 불렸다.

남성로 제일예배당 입구에서 종로에 이르는 골목의 끝에는 말이 끄는 방앗간이 있었다고 '말방골목'이 되었다. 또 계산동 매일신문 뒷길은 잘 가꾼 뽕나무가 시선을 끌어 '뽕나무 골목'이 되었고, 서문로 2가에서 수동으로 들어가는 네거리까지는 '등기점골목'이라 했다.

등겨를 전문으로 파는 점포가 있었기 때문이다. 금호호텔에서 현 곽외과까지는 '샘밖골목'으로 불렸는데, 호텔 건너편 쪽에 있는 큰 샘의 바깥쪽 골목이라고 그렇게 불렸다. '샘밖골목' 일대는 기생들이 많이 살아 '기생촌'으로도 이름났었다.

이 밖에 동성로 제일은행 건너편에서 중앙통까지를 '먹단골목'이라 했다. 골목어귀에 산 이름난 노기생의 집 뜰에 검은 목단이 심겨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었다. 또 '떡전골목'은 요즘의 북성로 돼지골목으로, 떡집들이 많아 그렇게 불렸고, 동아쇼핑센터에서 종로까지의 골목에는 개천가에 수양버들이 늘어져 있다고 '줄버들나무골목'으로 명명되었다.

큰 장 인근 귀암서원 옆에는 누룩점이 많아 '누룩전골목'이 되었으며, 동산파출소 오른쪽이자 실 가게 거리 왼쪽 끝은 말을 메어 두고 팔기도 하여 '말전골목'으로 불렸다. 그 앞쪽 소시장거리는 '소전거리'로 불렸고, 현 대구백화점 자리엔 쌀 전문점이 많아 '싸전거리'가 되었다.

동대구와 남구 대명동의 신흥주택지가 생긴 70년대 이후에는 차량소통이 불편한 도심의 골목들은 저절로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시청 옆의 헌책방골목, 북성로의 공구골목과 그 이웃의 깡통골목, 교동의 양키골목, 향촌동의 대폿집골목 등이 한 시절 성가를 누렸으나 사양길로 들거나 쇠락한지 오래이다.

길이 넓어 찾아가기 쉽고 주차장이 잘 갖춰진 수성구 들안길의 화려한 '먹자골목'은 이미 골목이 아니라 '푸드 타운'이자, '먹거리마을'로 불릴 지경이다. 여우가 둔갑술을 피웠다 할 만큼 삽시간에 젊은이의 팻션거리로 탈바꿈한 삼덕동의 '야시골목'은 그 감칠맛 나는 작명이 대명동의 옛 '야시골'의 환생인가 싶어 향수를 자아내게 하지만, 유행은 부나비 같은 것, 얼마나 오래 갈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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