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조두진이 만난 사람들] 이해인 수녀

이해인 수녀의 전화 목소리는 경쾌했다. 소녀의 목소리도 중년의 목소리도 아닌, 맑고 경쾌하다고 밖에 달리 설명하기 힘든 목소리였다. 그는 1976년 종신서원 이래 줄곧 부산의 성베네딕도 수녀원에서 수도인으로 살고 있다. 부산으로 찾아가겠다고 했지만 강연차 서울과 울산 등을 다니고 있어 부산에 와도 만나기는 힘들다고 했다. 그러면서 "며칠 뒤 대구 갈 일이 있으니 거기서 만나자."고 했다.

이해인 수녀를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수녀 된 거 후회하지 않으세요? 다시 태어나도 수녀가 되고 싶으세요?' 짓궂은 의도 보다, 평범한 사람과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다시 태어난다면? 글쎄요. 예쁜 아기를 네 명 정도 나아 기르는 엄마가 되고 싶어요. 아들 딸 상관없이 이름은 사계절을 따서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짓고 싶고요."

그 다음 말씀에서 그의 유머러스한 면을 엿볼 수 있다.

"기자들이 농담 삼아 그런 질문을 간혹 해요. 그래서 나도 농담으로 그렇게 대답했더니 대문짝만하게 제목으로 뽑아버리더군요. 농담이에요, 농담."

이해인 수녀는 '웃으라고, 웃으면 좋다.'고 했다. 그는 "보통 사람들의 결혼생활에 왜 후회가 없겠는가? 후회와 낙담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책임을 지고 살아가면서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삶이다. 수녀의 길도 마찬가지다. 왜 갈등이 없고, 힘든 일이 없겠는가? 그러나 그 속에 또한 충만한 행복감이 있다."

이해인 수녀는 흔히 수도자들이 어떤 결함이 있거나, (사람살이의) 재능이 부족해 수도의 길로 들어선 게 아닌가 궁금해하는 경우가 있다면서, "그렇지는 않고, 다만 생의 가치가 다를 뿐이다."고 했다.

※종신서원(終身誓願)-가톨릭에서 일생을 마칠 때까지 하느님에게 자신을 바치기로 서원하는 일.

◇ "왜 수녀가 되셨어요?"

이해인 수녀는 1964년에 수녀원에 입회했고, 1968년에 첫 서원, 1976년에 종신서원 했다. 뚜렷한 확신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확신을 가진 사람에게 '왜 수녀가 되셨어요?'라고 묻는다면 실례일 것이다. 그럼에도 궁금했다. 망설이고 망설인 끝에 어렵게 물었다.

'왜 수녀가 되셨어요?'

내 망설임과 달리 이해인 수녀는 조금도 주저함 없이 답했다.

"모태 신앙이었어요. 게다가 초등학교 입학 때 6.25가 터졌고, 그 전엔 일제 태평양전쟁이 있었고요. 사춘기 시절 약간의 허무주의에 빠져 있었던 것 같아요. 아이 적엔 다른 놀이가 없었고 위인전을 많이 읽었는데, 그런 인물들처럼 훌륭한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해인 수녀는 '아내가 되고, 엄마가 돼 헌신하는 것도 좋지만 모든 이의 작은 언니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물론 수녀생활이 쉬운 것은 아니다. 단체생활이다 보니 엄격한 규율 속에 자신을 가둬야 하고, 본성 혹은 자연을 거슬러 살아야 하는 면도 있다. 그러나 세월이 가고, 지내다보니 어느덧 적응하고, 체질에도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수녀원 초기, 친구들이 가끔 찾아와 동정하고 측은해 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남들 보기와 달리 내 생활은 충만했어요. 하루하루 힘들게 견디는 게 아니라 충만감을 확인하는 시간이랄 까요. 어쩌면 이게 내 본래 삶이 아닌가 싶어요."

◇ '민들레 홀씨' 30여년 시공초월

국내에 이해인 수녀만큼 널리 알려진 시인도 드물다. 교과서에서도 그의 시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국정과 검정을 합쳐 15곳에 그의 시가 나와 있다. 스무 살 즈음, 예비 수녀시절 부산 성베네딕토 수녀원 베란다 틈으로 핀 민들레 한 떨기를 보고 쓴 시가 '민들레의 영토'다. 돌 틈 사이에 끼인 그 초라한 영토에 앉아 충만한 꽃씨를 퍼뜨리는 민들레처럼 기도하며 살자는 마음으로 쓴 시다. 그 시는 10년쯤 뒤인 1976년 '민들레의 영토'라는 시집으로 묶여 세상에 나왔다.

초판 1천 500부. 그 소박한 씨앗이 꽃이 되었고, 꽃은 민들레 홀씨처럼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이미 50쇄를 넘었다.

이해인 수녀는 문인 집안에서 자랐다. 한국전쟁 때 납북된 아버지는 1930년대 '돌산령'이란 작품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됐고 오빠 이인구씨는 우리나라 1세대 카피라이터였는데, '맥주는 역시 OB, 친구는 역시 옛 친구' 라는 카피를 썼던 사람이었다. 이모부 이태극씨는 한국 시조계를 중흥시킨 인물로 평가받을 만큼 유명한 시인이었다. 물론 책읽기 외에 특별한 놀이가 없었던 성장기와 평생 걸어온 수도자의 길이 이해인의 시 쓰기에 밑거름이 됐을 것이다.

'수도자로서 글쓰기에 어려움은 없었을까?'

"글을 써서 발표하는 것에 수도원 동료들이 걱정과 충고를 많이 하셨어요. 수도자는 익명성을 미덕으로, 숨어서 배경이 돼야 하는데 개인이 도드라지면 공동체 안에 갈등의 여지도 있지요."

그는 시 쓰기와 공동체 생활을 조화시키는데 힘이 들었다고 했다. 공동체의 이해와 개인 사이에서 절충을 찾는데 세월이 필요했다고도 했다. 그런 과정에서 삶의 지혜도 생겼고, 한때는 (동료 수도인들에게) 서운한 마음을 갖기도 했지만 지금은 모두 고마운 마음이었음을 안다고 했다.

이해인 수녀는 지금까지 1천 편에 가까운 시를 썼다. 물론 널리 알려졌고 많은 사람들이 이해인 수녀의 시 한 두개쯤은 읽어보았거나 암송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짜 시'도 많다. 이해인 수녀가 쓰지 않은 시도 '이해인'의 이름을 달고 인터넷상을 떠돈다. 이런저런 짜깁기 한 시들도 있다. 어떤 대학에 강의를 간 적이 있었는데, 강의에 앞서 '자, 강의에 앞서 수녀님의 시 한 편을 낭독하겠습니다.' 하고 사회자가 낭독한 시가 '가짜 이해인 시'였다.

"그거, 내 시 아니다, 고 말할 수는 없었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었어요. '내 시가 아니다.'고 말하면 주최측이 얼마나 무안하겠어요."

◇ "가장 힘든 일이 화해와 용서"

이해인 수녀는 '편지 쓰는 수녀'이기도 하다. '문서선교'라고 하는 것인데, 다양한 사람들이 보내오는 편지에 답장 보내는 것이다. 2004년 이래로만 1천통 가까운 편지를 썼다. 종이 편지도 많고, e메일 편지도 많다. 아직도 보내야 할 답장이 많다. 수녀원 생활과 강연으로 빠듯하지만 답장 기다리는 사람을 생각하면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특히 초등학생들이 보내오는 편지는 그 편지를 썼을 고사리 손과 기다리는 마음을 생각하면 마음이 급하다고 했다.

이해인 수녀의 시 '용서의 꽃'에는 이런 시구가 있다.

'당신을 용서한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용서하지 않은 나 자신을 용서하기 힘든 날이 있습니다. 무어라고 변명조차 할 수 없는 나의 부끄러움을 대신해 오늘은 당신께 고운 꽃을 보내고 싶습니다.'

이해인 수녀는 "살면서 가장 힘든 일이 화해와 용서"라고 했다. 용서하는 척 하는 게 아니라, 진정한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지, 어쩌면 죽는 날까지 과제로 남을 것 같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용서하지 못해서, 또는 용서받지 못해서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후회의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그 자신도 매일 연습한다고 했다.

"용서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언짢은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 듣기 좋은 말을 하거나, 기도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내일은 나에게 없습니다. 내일의 용서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용서할 일은 오늘 하는 것이 평화를 갖는 길입니다. 내일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신문 봅니다."

이해인 수녀는 인터뷰 내내 뜨개질을 했다. 수세미를 뜨는 데 찻잔 받침으로 사용해도 좋을 듯 했다. 오래 해온 일인지, 수세미 하나를 완성하는데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부산 외국인 노동자 돕기 작은 음악회'에 내놓을 선물입니다. 음악회에 오신 분들 손에 작지만 선물하나쯤 들려 보내려고요."

누군가를 돕기 위해 나선 사람들에게 감사인사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그냥 말로 하는 인사도 좋지만 틈틈이 뜨개질한 물건을 하나쯤 건네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뜨개질을 한다고 했다. 강연 차 이동하는 기차 안이든, 인터뷰 중이든 틈만 나면 뜨개질을 한다고 했다.

이해인 수녀는 신문을 매일 본다. 수도자에게 무슨 신문이 필요하냐고?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야 한단다. 수도자라고 세상과 떨어져 살 수는 없다. 세상 돌아가는 소리, 사람살이의 현주소를 모르면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기도가 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종교인이 늘 좋은 이야기만 하고, 늘 좋은 이야기만 들으면 세상을 모르고, 사람살이의 어려움을 몰라요. 신문도 읽고, 때로는 거슬리는 이야기도 들어야 해요."

그는 대구는 사과가 참 유명한 고장이었는데, 지금은 무엇을 대표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대구 경제에 대해 걱정했고, 대구사람들 살이가 더 나아졌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이해인 수녀에게는 종교와 세속은 물론이고 종교간의 경계 역시 모호한 듯 했다. 영역을 나누거나 선 긋는 일을 경계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는 세상살이의 사소한 일에 대해, 불교와 스님과 교류에 대해, 기도와 문학에 대해, 심지어 '수녀 미인계'에 대해서도 농담처럼 이야기했다. 이렇게 만났으니 '기념사진'을 찍자며, 기자를 옆으로 끌어당겨 세우기도 했다. 그는 인터뷰 끝에,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모든 이들에게 위안과 축복이 있기를 기도합니다."라고 했다.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는….

1945년 강원도 양구출생. 본명 이명숙.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Olivetan Benedictine Sisters of Busan)소속 수녀. 1964년에 수녀원에 입회하여 1968년에 첫 서원, 1976년에 종신서원했다. 서강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졸업. 1976년에 첫시집 '민들레 영토'로 수녀 시인으로 등단한 이후에 9권의 시집, 5권의 산문집, 3권의 선집, 7권의 번역서를 펴냈다. 시인이며 부산가톨릭대 겸임교수. 여성동아대상(1985) 부산여성문학상(1998) 등을 수상했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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