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수용의 현장리포트] 한국은행 금고

돈이 탄생하는 곳은 조폐공사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조폐공사는 돈이라는 '물품'을 생산하는 곳일 뿐 돈이 제 가치를 부여받는 곳은 한국은행에 도착한 뒤부터다. 한국은행은 연간 지폐와 주화의 수요를 예측해 조폐공사에 생산을 의뢰하고, 생산원가와 이윤을 보탠 '물품 대금'을 치른 뒤 돈을 건네 받는다. '돈이 돈 가치를 하는 곳', 한국은행 대구경북본부를 찾았다.

이상하게 들릴 지 모르지만 한국은행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다. 1층 로비에 들어서 왼편을 바라보면 '화폐전시관'이 자리잡고 있다. 화폐의 시초인 물품화폐, 즉 벼나 화살촉부터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대한제국과 일제시대 화폐, 현재 통용되는 화폐까지 1천180여점이 전시돼 있다. 화폐가 제작되는 과정은물론 더러워져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됐을 때 잘게 부숴진 모습까지 살펴볼 수 있다. 아울러 이 곳에는 세계 65개국 화폐 680여점도 있다. 방학을 맞은 자녀들과 함께 한 번쯤 방문해 볼 만한 공간이다.

전시관 옆에는 업무팀이 있다. 은행 창구와 똑같은 모습. 지난 22일 1만 원권, 1천 원권 새 지폐가 선보이면서 신권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신권이 선보인 첫 날, 이곳에도 500여명이 찾았다. 하지만 화폐 수집가들이 선호하는 일련번호 'AA'로 시작하는 '귀한 돈'은 없었다. 일련번호 'AA0010001A'부터 'AA0030000A'까지는 한국은행 본점에서만 교부됐다. 지역본부에서 바꿔준 돈은 훨씬 뒷쪽 번호여서 사실상 희소가치는 없는 셈. 하지만 이색 번호를 건질 수 있다는 호기심에 새벽부터 줄을 선 것이다.

일반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은 바로 업무팀까지로 제한된다. 그 안쪽에는 투명 유리로 벽을 둘러친 발권팀이 있다. 은행에서 요청한 뭉칫돈을 내어주는 곳. 대구경북본부 기획홍보팀 김영진 과장의 안내로 발권팀 내부를 둘러봤다. 밖에서 벨을 누른 뒤 안에서 열어줘야 들어갈 수 있다.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자못 긴장된 분위기다. 안쪽을 들여다보니 금고문이 열려있다. 말로만 듣던 한국은행 금고다. 웅웅거리는 기계음과 함께 금고 안쪽에서 트레일러 가득 무언가 실려나온다. 가까이 다가서자 한 직원이 굳은 표정으로 소리친다. "거긴 안됩니다. 밖에서 보는 건 괜찮지만 안쪽을 들여다보시면 안됩니다." 당황한 표정으로 돌아봤더니 발권팀 직원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금고 안쪽은 저도 못들어갑니다. 가져나온 돈을 보시는 건 괜찮지만 금고는 곤란합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금고를 못보고 돌아간다면 너무 아쉽지 않은가. 잠시만 구경하겠다며 금고 앞 육중한 철문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얼핏 봐도 금고 문의 두께는 1m쯤 돼 보였다. 안쪽에 쌓여있는 분홍색과 녹색 뭉치들을 바라보며 잠시 넋을 잃고 있는 사이, 다시 트레일러들이 위협적인 경고음을 내며 금고 밖으로 줄지어 나왔다. 쫓기듯이 금고 바깥쪽으로 내몰리며 돈 다발을 구경하고 있는 동안 다시 육중한 철문이 닫혔다. 영화에서 보듯이 전자식으로 여닫는 게 아니라 사람이 직접 금고 문을 밀고 손잡이를 돌려 잠그는 방식. 철커덩 하는 소리와 함께 금고 문이 닫힐 때 내심 섭섭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행여 돈 욕심 때문은 아니었을까?

밖으로 쏟아져 나온 돈은 부피만 가로, 세로 1.5m 가량 높이는 어른 허리춤까지 달했다. 새로 나온 1만 원권과 1천 원권 뭉치. 발권팀 배해원 차장은 "지금 나온 돈은 만원권 30억 원과 천원권 1억 9천만 원"이라고 말했다. 아직 포장도 뜯어내지 않은 빳빳한 새 돈. 하지만 돈이라는 느낌보다는 색종이 더미를 보는 느낌. 1천장씩 종이 포장지로 묶인 만원권은 다시 1억 원 단위로 비닐 포장돼 있었다. 비닐 뭉치 하나를 들어봤더니 제법 묵직했다. 1억 원이면 1만 원권 1만장, 구권이면 11.4㎏이었지만 신권으로는 9.6㎏에 지나지 않는다. 사과상자에 담기도 편해졌다. 부피가 18% 가량 줄어 2억5천만 원을 담던 사과상자에 3억 원이 들어갈 수 있다.

배 차장은 "오늘 대구은행에서 신권을 요청해서 발권해주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제서야 바깥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 벽 너머 바깥쪽에 경호업체 직원 10여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그마한 유리창 사이로 서류를 주고받고 사인까지 끝낸 뒤에 비로소 문이 열렸다. 신권을 건네받은 직원들은 재빨리 현금수송차량으로 돈을 옮겼다. 일단 대구은행 본점으로 수송한 뒤 각 지점별로 나눠줄 계획이라고 했다. 김판석 발권팀장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은행 요청에 따라 신권을 발급해주고 있다."며 "지난 22일 발권이 시작된 뒤 대구지역 은행권에만 하루 평균 150억 원 이상 신권이 공급되고 있으며, 만원권이 90%를 차지한다."고 말했다. 신권 수송업무가 끝나자 발권팀 직원들의 굳은 표정도 스르르 풀렸다. 자못 경계하는 눈으로 취재진을 바라보던 한 직원에게 "아까와는 표정이 많이 다르네요?"라고 농담을 건넸더니 "매일 하는 일인데도 항상 긴장을 늦출 수 없다"며 그제서야 웃어보였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은행 금고에는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있을까? 김판석 발권팀장은 "보유 금액조차도 대외비일만큼 보안이 필요한 곳"이라며 양해를 구했다. 하지만 추정해 볼 수는 있었다. 지난해 대구경북본부에서 발행한 돈은 모두 2조 400억 원. 평균 석달치 정도의 자금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라는 한국은행 설명을 기준으로 보면, 이곳 금고에 들어있는 돈은 5천억 원이 넘는다는 계산이다. 지역본부에 있는 돈은 한국은행 본점에서 가져오는 게 아니다. 경산조폐창에서 생산한 돈은 곧바로 지역본부로 옮겨진다.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돈이 경산시 갑제동에 있는 조폐창에서 대구시 중구 동인2가에 있는 한국은행 대구경북본부로 옮겨진다는 말.

하지만 돈이 오가는 시기나 금액은 철저히 비밀이다. 심지어 전화를 통해 현금 수송을 의뢰할 때조차 '돈'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대신 조폐창과 한국은행 사이에서만 알 수 있는 암호를 통해 주문과 수송작업이 이뤄진다고 했다. 도청해봐야 소용없다는 뜻이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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