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떠나자! 삶의 터전 속으로)반변천이 만들어 낸 문향(文鄕)의 고장 영양

▨ 입암의 남이포

백두대간 우뚝 선 봉우리 일월산에서 시작되는 물줄기들이 낙동강으로 흘러가면서 수만 년 동안 끊임없이 하천 바닥을 깎고 물길을 바꾸면서 골짜기 사이로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혜택을 남겨 놓은 땅이 영양이다. 영양을 대표하는 반변천을 따라 31번 국도로 올라가면 산자락에 숨은 듯 열려 있는 강줄기 옆으로 과거와 지금 사람들의 흔적과 문학의 향기를 불러일으키는 곳이 숨어 있다.

명주실처럼 이어지는 반변천 물줄기는 굽이굽이 산굽이를 틀면서 심하게 강바닥을 파기도(하방침식) 하고, 옆의 절벽을 깎기도(측방침식) 하고, 퇴적물을 조용히 쌓아서(하안단구) 고을들이 자리 잡도록 해주었다.

반변천 주변은 놓칠 수 없는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그 중에서도 첫 번째로 꼽는 곳이 입암의 남이포이다. 남이 장군의 전설이 고스란히 서려 있어 남이포라 하지만, 이런 하천 절벽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일월산에서 발원하여 하천절벽의 왼쪽으로 흐르다 합류하는 동천(청계천)과 오른쪽의 반변천이 심한 곡류를 하면서 측면을 깎다가 절벽을 절단하여 결국 동천이 흐르던 자기 물길을 버리고 반변천에 합류된 곳이 남이포인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선바위는 하천쟁탈(반변천과 동천)에 의해, 곡류절단에 의해 만들어진 대표적 지형이다. 지형도에서 서쪽의 동천은 ①~②방향으로, 동쪽의 반변천은 ③~④방향으로 흐르는 상태에서 두 하천 간에 측면침식이 강하여 지형도와 같이 곡류절단이 나타나 ①~④방향으로 하천이 흘러 약 4.8㎞의 하도(물길)가 단축되었다. 신사리의 구하도(과거 동천의 물길)는 농경지로 이용되며 서석지가 있는 연당리 양반마을의 경제적 기반이 되는 농경지를 제공해준 것 같다.

영양읍이 자리 잡은 곳도 아득한 옛날 반변천이 유로 변경을 하면서 만들어 놓은 구하도이며, 삼지리 일대도 이와 같은 작용으로 형성되었으며 과거 강바닥의 흔적을 3개의 연못이 대신하고 있다.

▨ 남이포 주변에 대한 Q&A

▶반변천을 따라 형성된 마을과 농경지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반변천과 같이 바닥을 아래로 파면서 흐르는 하천을 감입곡류(嵌入曲流)하천이라고 한다. 이런 곳은 경치가 매우 수려하다. 빙하기에 암석의 틈 사이로 스며들었던 물이 얼면서 부피 팽창을 하여 산 위의 큰 바위들이 작은 돌로 깨지고 산 아래로 이동한다. 따라서 하천 양 옆의 산에서 많은 퇴적물질이 쌓이고, 상류에서 운반된 퇴적물도 강바닥을 퇴적시켜 넓은 들을 형성한다. 다시 따뜻한 간빙기가 되면 강수량이 많아져 하천에 물이 흐르게 된다. 하천의 물이 흐르면서 퇴적면의 아래 방향으로 깊게 깎아 계단 모양의 언덕 단구(段丘)를 만든다. 이런 과정을 통해 감입곡류하천 주변에 하안단구가 형성된다. 하안단구에는 과거 하천 바닥의 흔적인 자갈들이 발견된다. 영양에 갔을 때 과거 하천 바닥의 증거가 되는 둥근 자갈을 찾아보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반변천을 따라 형성된 마을과 농경지는 대부분 이런 단구에 형성되어 있다. 교리리, 병옥리, 하품리, 노달리, 입암 등이 이에 해당된다.

▶감입곡류의 절단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이용되는가

감입곡류하천은 아래로 깊이 파면서 흐르기도 하지만 물돌이를 하면서 하천의 측면도 많이 깎으면서 흐른다. 반변천과 같은 감입곡류하천의 목부분을 양쪽에서 계속 깎아버리면 절단되어 유로가 짧아지게 된다. 새로 형성된 물길은 하천의 아래 방향으로 침식을 계속함에 따라 이전에 흐르던 구하도의 하천 바닥보다 고도가 낮아져 구하도에 갇혀 있던 물은 새로운 유로로 흘러들어 구하도의 흔적만 남게 된다. 이 구하도는 자갈, 모래, 혹은 진흙이 퇴적되어 있으나 주변 지역에 비해 평탄지형을 이루므로 논으로 개간하거나 밭으로 이용된다. 반변천을 따라 건설된 31번 국도를 따라 오면 진보, 영양읍내와 삼지리 일대가 구하도에 위치한 대표적인 곳이다.

▨ 함께하면 좋은 체험 장소들

▶연당리의 서석지

서석지는 조선 광해군(光海君) 5년(1613)에 석문 정영방 선생이 경정(敬亭) 앞에 만든 조선시대 민가의 대표적인 연못이다. 서쪽의 구릉 아래 흰 돌이 서 있는 곳에 못을 파서 서석지라 이름을 짓고, 그 위에 정자를 세웠다. 좌우로 주일재(主一齋)와 운서헌(雲棲軒)을 두고 경정(敬亭)이라 일컬었다. 이 정자는 자손들이 여러 차례 중수하였으며 사방 부연을 달고 사면에는 난간을 돌렸으며 좌편에 서실 두 칸을 별도로 개축하였으니 주일제라 말한다. 못 가운데는 부용화(연화)가 있어 여름에는 정자 위로 향기를 풍긴다. 정자 앞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경관을 더욱 좋게 하며 경정의 역사(현재 수령이 400살이 넘었다)를 말하여 준다.

▶두들마을과 이문열

두들마을은 반변천의 지류인 화매천의 하안단구면에 발달한 마을이며 멀리서 보면 큰 바위가 많아 두들마을이라 불리워졌다. 조선시대 광제원이 있었던 곳으로 석계 이시명 선생이 개척하여 그의 후손 재령 이씨들의 집성촌이다. 석계고택, 석천서당 등 전통가옥 30여 채와 동대, 서대, 낙기대, 세심대가 새겨진 기암괴석을 비롯해 궁중요리 서책을 쓴 정부인 안동 장씨의 비석 등이 잘 보존되어 있는 전통마을이다. 이문열의 '그해 겨울',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폐원', '변경', '선택' 등 많은 작품들의 배경이 됐던 곳이다.

▶감천마을과 오일도

감천마을은 조선 문단 4호에 '한가람 백사장에서'로 문단에 등단한 후 1936년 사재를 털어 최초의 시 전문지 「시원」을 창간해 5호까지 발간하여 시문학을 풍요롭게 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던 오일도의 고향이다. 마을 입구 31번 국도변에 시비가 세워져 있고, 생가 앞 하천 절벽에는 측백수림 군락이 자생하고 있다.

▶주실마을과 조지훈

한양 조씨 집성촌으로 배 모양같이 생겼다고 해서 주실이다. 작고 외지고 사람도 그다지 살지 않을 것 같은 곳에서 정말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이 마을을 대표 하는 조지훈 시인은 청록집, 승무, 봉황수, 풀입 단장, 조지훈 시선, 역사 앞에서 등 많은 시집을 남겼으며, 마을 입구에는 '빛을 찾아가는 길'이라 새겨진 시비가 세워져 있다.

▶봉감5층모전석탑(국보 187호)

봉감동 반변천의 하안단구 위에 위치한 웅장한 탑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만들어 쌓은 모전석탑은 재료로 석재(石材)가 이용되었을 뿐 그 형식은 전탑과 같은 축조과정을 거친다. 이런 석탑으로는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634년), 제천 장락리 7층모전석탑(고려), 정선 정암사 수마노탑(고려) 등이 있다.

▶수하계곡

수하 2리에서 시작, 북쪽 송방 휴양림을 지난 곳에 이르기까지 장수포천을 따라 30여 리 정도 펼쳐져 있다. 계곡은 울진 왕피리로 내려가면 왕피천으로 불리어진다. 성류굴을 지나 망양정 앞에 이르러 동해바다로 흘러든다. 물살 틈에 갖가지 기묘한 형상의 바위와 모래톱과 자갈밭을 만든다. 계곡 주변 절벽지대나 야산에는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김시구(영남삶터탐구연구회, 원화여고 교사)

참고 자료 : 삶터탐구활동 길잡이(대구남부교육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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