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이판 사판

▲ 지안 스님(은해사 승가대학원장)
▲ 지안 스님(은해사 승가대학원장)

어떤 일에 있어서 막다른 데 이르러 어쩔 수 없이 물러서지 않고 결행해야 될 상황이 되었을 때를 '이판(理判) 사판(事判)'이라고 한다. 이 말은 '어찌되던 한 판 해보자'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기도 하다. 국어사전에는 이판과 사판을 합쳐 쓰면서 이판사판이라고 해 놓았다.

그런데 이 '이판사판'이라는 말은 본래 불교에서 쓰던 용어다. '이판'이란 수도에 전념, 참선을 하거나 경전을 보는 등 공부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스님들을 두고 하는 말로 이를 이판승이라 하였다. 반면 '사판'이란 절의 재산을 관리하고 사무를 처리하는 스님들을 두고 사판승이라 하였다. 다시 말해 스님들이 어떤 일에 종사하느냐의 그 역할을 두고 구분하던 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이 이판사판이라는 말이 본래의 뜻과는 다르게 왜곡되게 쓰이고 있는 것 같다. '이판사판이다' 하면 마치 끝장을 보자는 뜻으로 쓰이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매우 무모하고 급박한 상황을 나타내는 말 같기도 하다.

때문에 이판사판이란 말을 들으면 막판에 몰려 절체절명의 위기나 온 듯이 공연히 상황악화가 오지 않을까 불안해지는 심리가 되는 수도 있다. 때로는 운명의 주사위를 던지면서 최후 결전의 승부수를 띄우는 이야기로 들리기도 한다.

"에라, 모르겠다. 이판사판이다." 가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말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신중한 선택이 아닌 자포자기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무책임한 뉘앙스를 진하게 풍기고 있다. 인생사에 있어서 어떤 일을 이판사판으로 해보자는 식은 지양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한다.

차근차근 성실한 진행을 거쳐 시의적절한 때를 잡아 과감하게 일을 추진하는 경우 '이판사판이다.' 하고 독백할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여유 있는 마음을 가지고 오랜 검토와 준비를 거쳐 이(理)와 사(事)가 원융하고 조화되게 하여 소신과 자신감을 가지고 하는 일이 성공의 확률이 훨씬 높을 것이라는 말이다. 모르는 일을 억지로 하려고 하는 것은 낭패 보기 일쑤가 아니겠는가?

올 하반기는 대선정국의 정치열기가 고조될 것이다. 이런 시국에 편승해 이판사판으로 정치도박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선거열풍에 휘말려 조용히 있어야 할 자기자리를 이탈하고 바람개비처럼 윙윙 돌려고 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만약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 준비해둔 격언 한마디가 있다. '깊은 물은 고요히 흐른다.'

지안 스님(은해사 승가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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