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송백자] ④사기대장의 하루(상)

▲ 그릇 빚는 사기대장/ 그림 김동광
▲ 그릇 빚는 사기대장/ 그림 김동광

'사기대장의 하루'는 청송백자 마지막 사기대장 고만경 옹과 법수광산 인근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한 픽션이다. 무엇보다 청송백자는 제작과정이 특이하며 생소한 전문용어들이 많고 당시의 생활상도 지금과 크게 달라,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1950년대 어느 봄날 젊은 사기대장의 하루를 그렸다.

첫닭이 울려면 한 시간은 남은 듯하다. 청송군 부남면 웃화장골. 열대여섯 평 남짓 산비탈을 깎아 돌과 흙으로 담을 둘러쳐 이엉을 올린 나지막한 사기움막은 아직 어둠에 싸여있다. 봄날이지만 수비한 흙덩이를 쟁여놓고 물일을 하는 사기움막 안은 눅눅하다. 잠자리에 같이 든 잡부 두 사람은 아직 고단한 몸을 뒤척이며 한잠에 빠져있다. 수정꾼 신씨는 벌써 희미한 호롱 아래 꼬막을 밀고 있다. 고 대장은 홑이불을 개고 깔고 누웠던 널빤지를 한쪽에 세워둔다.

길쭉한 널빤지는 성형한 그릇들을 나란히 놓아 말린 후 옮기는 기구지만 흙바닥 봉내방에 잘 때는 깔고 자는 침상으로 썼다. 잡부들 더러는 가마때기를 깔고 자기도 하지만 고 대장은 빈대가 끓고 눅눅한 가마니보다 널빤지를 좋아했다.

뒷간을 갔다 오는 동안 수정꾼 신 씨는 꼬박을 민 뭉툭한 흙덩이를 물레 위에 올려두고 함지박에 물을 받아 두었다. 언제나처럼 고 대장은 흙덩이를 조금 떼내어 손끝으로 비벼 숙성도를 점검한 후 가로질러 놓은 통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물레를 가볍게 차기 시작한다. 발물레가 슬슬 도는 동안 흙덩이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면서 원뿔 모양으로 잡아나간다.

물레가 스륵스륵 제법 속도를 내자 고 대장은 흙덩이 아래로부터 힘을 주며 위로 쭉 뽑아 올려 엄지로 흙덩이 중간을 눌러 위를 벌려나간다. 순식간에 사발 모양이 잡힌다. 그리고는 함지박에 걸쳐진 젖은 젓갖으로 그릇 입둘레를 한번 쓱 문지른 다음 사발 밑동을 칼로 잘라 옆에 있는 널빤지 위에 올려놓는다.

그릇 하나 빚는 데 걸리는 시간이 한 술 뜨는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잠깐 사이 널빤지에 사발 열 개가 올려지자 수정꾼은 봉내방 위에 들어다 놓고 모양이 이지러진 것은 바로잡는다. 수정꾼 신 씨는 손재주가 남달라 찌그러진 그릇도 그의 손이 닿으면 금방 제 모양새를 잡는다. 터득하기까지 쉽잖은 시간이 필요한 수정꾼이기에 사기대장 다음으로 보수가 많고 대접받는 기술자이다. 얼마 전에는 그릇에다 그림을 한번 넣어보라고 했더니 제법 그럴싸하게 휘둘리는 품이 머잖아 가마를 맡아 대장 노릇해도 될 듯했다.

말 없이 두 사람이 널빤지 열 개쯤 채웠을 때 잡부들이 부스스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어느덧 희붐하게 날이 밝아 모두들 각자의 냄비를 들고 아궁이 앞으로 모여든다. 아침이건 저녁이건 세 끼 밥은 각자가 해먹는다. 냄비에는 지난밤 자기 전에 앉혀둔 보리쌀이나 진배없는 쌀이 불어있다. 그나마 고 대장과 수정꾼 신 씨 냄비는 쌀알이 제법 희뜩희뜩하다. 대장과 수정꾼은 점주한테 한 달 양식으로 쌀 서 말씩 받지만 잡부는 보리쌀 너 말, 쌀 닷 되가 고작이다.

양식은 늘 빠듯하고 언제나 배가 고프다. 각자가 받은 양식은 한 달간 늘여 먹어야 하기 때문에 양식이 모자라 밥을 굶어도 같이 먹자고 권하는 법이 없다. 오래전부터 해오던 관행이라 서로 불편해 하거나 섭섭해 할 일도 없다. 반찬 역시 나름대로 알아서 해먹는데 된장·간장이 전부이고 그나마 여름이면 나물쌈이나 풋고추를 곁들인 별미를 맛볼 수 있다.

아침을 먹은 후 각자 냄비를 들고 가마 옆 개울가로 내려가 설거지하고 목 한번 문지르고 얼굴에 물 한번 끼얹는다. 돌아서면 흙구덩이에 뒹굴 터인데 씻은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홑저고리 자락으로 물기를 훔치니 씻은 흉내뿐이다. 각자는 점심거리를 씻어 앉힌 냄비를 들고 사기움막으로 돌아온다. 허리춤에서 곰방대를 꺼내 담배 한 대 쟁일 쯤이면 아랫마을서 날품 파는 잡부 둘과 '안골댁'이라 불리는 과수댁이 사기움막 안으로 들어선다. 오늘은 가마에 그릇을 넣는 날이기 때문에 널판 위의 그릇을 날라줄 안골댁을 하루 불렀다.

뒤이어 황소 등에 길마를 메우고 '딸랑딸랑' 요령소리를 울리며 지게를 진 중늙은이가 사기움막을 향해 올라온다. 그는 움막 거적문을 들치고 아는 체하는가 싶더니 곧장 황소를 앞세우고 산길을 잡아 오른다. 중늙은이는 재 너머 있는 법수골 백토 광산에 가서 캐낸 도석을 날라야 한다.

도석은 곡괭이·정·망치로 굴을 파고 들어가 전문으로 캐는 광부들이 있다. 굴은 입구에서 조금 들어가면 질 좋은 백석의 맥을 따라 이리저리 몇 갈래로 갈라져 있다. 가장 양질의 도석은 이빨로 깨물어 씹힐 정도로 무르고 희다. 질이 낮은 도석은 철분 녹물이 배어나와 누렇고 단단하다. 광부들은 전에는 도석을 캐서 일일이 등짐으로 날랐는데 얼마 전에 광산주는 굴 안에 레일을 깔고 갱차를 설치했다.

점주는 광산주와 1천 근 단위로 거래를 한다. 중늙은이가 아침나절에 나서 황소 등에 한 150근 올리고 지게에 50여 근 지고 돌아오면 저녁 해가 뉘엿해진다. 하루 200여 근씩 날라도 늘 흙이 모자라 사기대장과 수정꾼이 노는 날이 생기니 하루도 거를 수가 없다. 품삯은 나르는 만큼 받기 때문에 점심은 늘 주먹밥 한 덩이로 때우지만 지게 짐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소 요령소리가 잦아질 즈음 잡부들은 디딜방아에 도석을 채워 넣고 찧기 시작한다. 디딜방아는 농가에서 쓰는 것의 한 배반은 될 만큼 큼지막하다. 모양새도 여느 것과 달리 나무공이 끝에 큼지막한 돌덩이가 달려있다. 도석을 넣는 홈통도 펀펀한 돌판으로 되어있다. 잡부 두 사람은 방아가지를 밟고 한 사람은 옆구리에 붙어서서 찧는다. 쓰라잡이라고 불리는 한 사람은 홈통에 쪼그리고 앉아 튀어나오는 도석을 홈통으로 쓸어 넣는다. 방아가 번쩍 올라가 한번 내려치면 사기움막이 쿵쿵 흔들린다.

고 대장은 사기움막 옆 산비탈에 기어오르듯 엎드린 5칸 가마 첫 칸 안으로 들어간다. 사기굴 바닥은 밥알이 떨어져도 주워 먹을 만큼 깨끗하게 쓸어놓았다. 천장도 이미 엊저녁 흙고드름을 떼어내고 도석 찌꺼기 물에 개어 덧칠해둔 터라 말끔하다. 뒤따른 수정꾼 신 씨는 빻고 남은 도석 찌꺼기인 사토를 삼태기 가득 담아 가마 안으로 들이민다.

고 대장은 가마 안 뒤쪽 가장자리 바닥부터 도석 찌꺼기를 평평하게 깐다. 이렇게 깐 도석은 흙을 녹이는 가마불에도 녹지 않아 그릇 굽바닥에 잡물이 붙지 않고 깨끗해질 것이다. 그동안 수정꾼과 안골댁은 바짝 건조된 종발이나 접시, 제기 잔대, 사발 따위가 열 개씩 올려진 널빤지를 어깨 위로 받쳐 들고 와서 가마 칸 문 앞에 내려놓는다.

전충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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