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종지기가 있었다.
오전 4시면 어김없이 교회 종을 쳤다. 추운 겨울 날. 장로님이 시골장에 가서 목장갑을 하나 사 드렸다. 그러나 그 종지기는 그 장갑을 한 번도 끼지 않았다. 맨손으로 서리가 서걱거리는 종 줄을 잡고 새벽종을 쳤다.
왜 그러느냐고 묻자 종지기는 이렇게 대답했다. "새벽 종소리는 가난하고 소외받고 아픈 이가 듣고, 벌레며 길 가에 구르는 돌멩이가 듣는데, 어떻게 따뜻한 손으로 칠 수 있어?" 그리고 그는 하얗게 내린 서리가 달빛에 보석처럼 빛나는 마당을 가로질러 자기 방으로 갔다.
그 종지기가 바로 '몽실언니'의 권정생 선생이다. 그는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피를 찍어 동화를 썼지만, 늘 힘들고 어려운 이를 위해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지난 5월 17일, 향년 70세로 그는 세상을 떠났다.
작가 권정생은 이 시리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모든 인터뷰를 거부했다. 그래서 기자는 그의 마지막 길이 더욱 안타까웠다. 그를 못 만난 것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에 둘도 없는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던 그의 일생을 고스란히 옮겨 전하지 못한 애석함에서다.
그래서 30년 가까이 지근에서 그를 모시고, 마지막 임종까지 지킨 김용락(48) 시인의 입을 통해 그의 상처와 삶을 들여다본다.
그는 1937년 일본 도쿄 변두리 빈민촌의 헌옷 장수집 뒷방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행상에 넝마주이였고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했다. 이때 아버지가 주워온 헌책 더미에서 '인어공주'와 같은 동화책을 읽으면서 책을 가까이하게 됐다.
광복을 맞아 가족이 귀국해 외가인 청송군 화목면에서 초등학교를 1년간 다녔다. 이후 아버지 고향인 안동군 일직면으로 이사했으나 비루한 살림에 더 진학을 하지 못하고 나무를 해다 병아리를 사 키우는 등 힘든 소년기를 보냈다.
좀 더 커서는 안동읍내의 한 잡곡상에 취직했지만, 저울을 속이라는 주인의 말에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 그 길로 월급도 안 받고 부산으로 향했다. 재봉틀 수리도 하고, 신문도 배달하며 힘겹게 살던 중 열여덟 살 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신결핵까지 얻었다.
고향에 왔지만, 동생이 결혼하면서 함께 살 수 없어 집을 나오게 된다. 이후 그는 예천 등을 떠돌며 거지 같은 삶을 살게 된다. 나이 서른쯤 고향에 돌아왔을 때는 부모는 죽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진 뒤였다. 이후 일직면 조탑리의 교회 종지기를 시작하며 자신의 아픔을 승화시켜 동화를 쓰게 된다.
그는 40년 가까이 병을 달고 살았다. 오줌도 호스로 받아냈고, 하나밖에 없는 신장마저 결석으로 고통받았다. "하루라도 안 아프고 살아봤으면…."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얼마나 아팠으면 지나가는 말로 "니(김용락)가 내 대신 아파도고."라고 했을까. 건강이 좋았을 때도 여름에 '풀짐을 한 짐 지고 있는 것'처럼 힘들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소외받고 힘없고, 약한 주인공을 등장시켜 삶의 희망과 믿음을 그려낸 동화를 썼다. 1967년 '강아지 똥'만 해도 그렇다. 아무 쓸모없다고 슬퍼하던 강아지의 똥이 '하느님은 쓸데없는 물건은 하나도 만들지 않았다.'는 흙의 말을 듣고 희망을 얻어 거름으로 부서져 고운 민들레꽃을 피운다는 이야기다. 대표작인 '몽실언니'에 나오는 인물도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천대받는 이들이다.
그는 철저히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새 옷을 입은 적이 거의 없었다. 겨울에도 헌 군복에 누비 솜바지에 고무신을 신었다. 살림도 20년 가까이 벽지도 안 발린 헛간에 다 그을린 양은냄비, 석유풍로가 고작이었다. '몽실언니'의 인세로 타계하기 전까지 살았던 흙집을 지었고, 최근에야 8인치 TV를 들였다고 한다.
'겨울이면 생쥐들이 와 이불 속에 들어와 잤다. 자다 보면 발가락을 깨물기도 하고, 겨드랑이까지 파고들어 오기도 했다. 처음 몇 번은 놀라기도 했지만, 지내다 보니 정이 들어 아예 발치에다 먹을 것을 놓아두고 기다렸다.'
그렇다고 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몽실언니'만 하더라도 1년에 4만 부가 팔린다. 인세만 3천200만 원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그의 책은 약 80여 종에 이른다. 그는 돈이 생기면 남을 위해 다 썼다.
서울 청량리 윤락녀 쉼터 짓는 데도 보냈고, 앵벌이들을 위한 보호소를 짓는 데도 기부했다. 그는 어린이들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졌다. "어린이들을 상대로 판 책 수입인데, 어린이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도 남달랐다. '배고프셨던 어머니/ 추우셨던 어머니/ 고되게 일만 하신 어머니/ …/ 어머니와 함께 그 나라에서 오래오래 살았으면/ 오래오래 살았으면…'('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중에서). 지금쯤 그 나라에서 다시 만나 외갓집도 가고, 남사당놀이도 함께 구경하고 있을까.
"내 죽을 때 300만 원 있으면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 돈으로 화장해 집 근처에 뿌리고, 집도 없애 자연 상태로 돌리고, 기념관도 절대 짓지 말라고 당부했다. 철저한 무소유에 금욕으로 평생을 산 그는 처음 올 때처럼 '무'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결혼을 하지 않은 채 평생 아프고, 평생 외롭고, 평생 힘들었던 그는 유언장에 이렇게 썼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스무 다섯 살의 건장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그래서 스무 두세 살 된 아가씨와 연애하고 싶다. 그때는 벌벌 떨지 않을 것이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1937년 일본에서 출생. 1969년 월간 '기독교 교육'에 동화 '강아지 똥' 당선. 197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동화 '아기 양의 그림자 딸랑이' 입선.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무명저고리와 엄마' 당선. 1975년 동화집 '강아지 똥'을 간행하고 이후에 많은 동화집과 산문집·장편소설 등을 간행했다. 1969년 기독교 아동문학상, 1975년 한국 아동문학상, 1995년 새싹문학상을 수상했다. 2007년 5월 17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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