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성지를 찾아서] 불교 성지⑫-팔공산 부인사

"몽고 침입 막자" 고려 초조대장경 모신 호국사찰

선덕여왕의 명복을 비는 신라 원찰(願刹)이요, 몽고의 침입을 불력으로 막기 위해 고려 초조대장경을 모셨던 팔공산 부인사(符仁寺, 夫人寺)가 해탈을 꿈꾸고 있다. 해탈(解脫)? 정확하게 따진다면 현재 비구니들의 수행 도량인 부인사가 해탈을 꿈꾼다는 표현은 틀렸다. 그러나 참 승려들이 무명(無明)을 씻고 일체의 번뇌를 끊어 반야(般若·지혜)를 밝히는 '해탈의 경지'를 가듯 팔공산 부인사도 조용히 그런 길을 걷는다는 느낌이 강하게 와닿았다. 반갑고 놀라웠다. 부인사를 찾아드는 승속(僧俗)이 무명과 번뇌의 티끌을 씻어내고, 부귀영화를 향해 붕붕 떠다니는 마음을 가라앉혀 무소유로 가면 그게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인 각자(覺者)가 되는 길이요, 해탈에 이르는 첩경이 아닌가?

서기 647년에 창건되었으니, 올해로 1천360세인 팔공산 부인사는 재물과 권세를 쌓는데만 중독되어서 점점 더 허덕이게 되는 세상 풍조를 거슬러 하나둘 버려야 진리를 얻게되는 무소유의 역설을 가르칠 선방, '일화선원'(一花禪院)을 짓고 있다. 여성들과 깊은 인연을 맺어온 팔공산 부인사가 대구 경북에서 처음으로 비구니 선방을 회향(2010년 예정)하는 그날, 세간 출세간을 막론하고 대구 여성들은 새로운 마음의 안식처를 갖게 될 것이며, 지역 불교계의 청정수행 풍토에도 한 획을 그을 것으로 보인다.

◈사자후 토하는 비구니 나올 수 있을까

가칭 '일화선원'이라는 선방명은 십여 년 전, 백양사 서옹 스님이 지어준 이름이다. 선방명으로는 너무 곱다 싶은 이름이지만, 의외로 그 뜻이 깊다. "국내외 비구니 선방 가운데 으뜸이 되라."는 서옹 스님의 큰 당부가 담겨 있다. 비구니들의 참선 도량이 될 부인사 선방은 이제 막 건물만 세워졌다. 241㎡ 크기이니, 비구니 이삼십 명은 너끈히 수행에 들 수 있는 규모이다. 이삼십 명 승려가 수행하려면 그 뒷바라지를 해줄 대중 스님도 꼭 그만큼 더 있어야 한다. 적어도 오륙십 명이 동시에 거처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어야 하고, 선방 내부공사도 해야 한다. 선원을 찾아올 비구니들이 참선 수행을 하다가 쉴 수 있는 요사채도 마련해야 한다. 그러니 선방 회향은 아직 멀었다. 2010년경, 부인사 선방이 문을 열면 지역 불교계와 여성계에는 참신한 새 바람이 불 것으로 보인다. 불력으로 나라를 다스린 선덕여왕을 모신 원당이요, 그 선덕여왕을 기리는 선덕여왕 숭모대전(매년 음력 3월 15일)이 지역 여성(선덕여왕숭모회)들에 의해 치러지며, 두 손가락을 소지공양한 비구니 성타 회주 스님이 중창불사에 이어 비구니 선방까지 선보이게 되면 승속을 초월하여 여성발전의 큰 계기가 되리라 여겨진다. 뿐만 아니라 부인사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승시가 열렸던 거찰이요,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보호하려던 장경각이 있었던 유서깊은 성지가 아닌가.

◈나는 삼류중이야…

지금부터 21년 전인 1986년, 천년 고찰 부인사는 1011년에 조판되기 시작한 고려 초조대장경을 모신 절이 맞냐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쇠락한 상태를 면치 못하였다. 겨우 퇴락한 대웅전(현재의 명부전 자리)과 쓰러질 듯 낡은 요사채(구길로 올라오면 계단 왼쪽에 자리 잡은 건물) 그리고 (선덕여왕)숭모전뿐이었다. 오래된 탑과 부도, 경내 곳곳에 흩어져 있는 석재 그리고 300년 넘은 토종 벚나무만이 부인사의 연륜을 얘기해 줄 뿐이었다. 그 시절, 석가탄신일 등에 부인사를 찾은 불자들은 허물어질 듯 오래된 축대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서 겨우 공양할 자리를 만들어야 할 정도로 궁기가 들었다.

"처음 절에 오니 등기된 땅은 하나도 없었어. 미등기 대웅전뿐이었지. 내가 가진 건 단돈 7만 원, 쌀 두 되가 고작이었어. 소임을 받아서 같이 온 식구는 대여섯 명이나 되고, 어쩔까 싶은데 아는 신자가 쌀 한 가마를 올려주더라고. 거기서부터 시작했지."

지금 부인사는 대웅전, 삼광루, 현음각, 명부전, 산신각 등 11개의 법당과 당우 요사채를 갖고 있다. 하지만 구 사역을 되찾으려면 멀었다. 여전히 당간지주는 순환도로 건너편 포도밭에 있다. 두 손가락을 소지공양하고, 석남사에서 3년 결사를 마친 뒤, 영천을 거쳐 부인사에 든 성타 스님은 엄청난 중창불사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나는 삼류중"이라며 깎아내린다. "일찍부터 부처님 밥 먹고 늙었으니 지혜를 얻어 중생을 제도해야 하는데, 이제 지혜를 밝히기에는 너무 늦었어. 사람은 그릇과 같아서 한번 깨어지면 물 한 모금 못 담는 거야. 그러니 나는 중노릇 잘못한 게지…."

◈ 편의보다 원칙을 지켜나간다

하지만 기자는 회한에 젖은 성타 스님이 누구보다 원칙과 전통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운수납자라는 것을 안다. 하루 8시간씩 사분정진을 계속하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주 만물을 깨우는 새벽 도량석(오전 3시)과 부처님의 법속에서 하루를 마무리짓는 저녁 도량석(오후 9시)까지 다 지켰다. 좋은게 좋다는 편의주의적 발상이 용납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무명을 깨치지 못한 아쉬움을 후배 비구니들을 위한 선방 건립으로 대신하고 있다.

"회주 스님이 사자후를 내뿜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부인사 선방에서 사자후를 토하는 비구니가 탄생할 날이 올 수도 있지 않겠어요." 주지 종진 스님은 그렇게 믿으며 뒤를 잇고 있다. 하지만 복원 불사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한때 국내 유일의 승시(僧市)가 서고, 2천여 명의 승려가 기거했다는 과거의 영화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들이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 숨겨진 여래를 찾기를 바라는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을 이루기를 바라는 것이다.

◈ 조선팔도에서 하나뿐인 부인사 승시(僧市)

팔공산은 사실 동화사와 파계사가 지키고 있다. 버스도 동화사와 파계사 입구에 서고, 부인사에서는 서지 않는다. 대중교통도 불편하여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힘이 든다. 영남 불교의 요람인 동화사와 파계사가 팔공산의 좌우 날개에 해당된다면, 부인사는 심장과 몸체에 해당된다. 몸체에 해당하는 부인사가 비상해야, 큰 영향력을 불러일으킬 것 같지만 아직은 미완이다. 쓸데없는 역할에 목매다는 것도 아니다. 한때 39개의 부속 암자를 거느리고 2천여 명의 승려가 모여 살며 승시가 서기도 했다는 거찰 부인사는 오히려 "필요없이 많은 것을 갖는 생활에서 벗어나, 허덕이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자 참선"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부처님이 나를 섬겨라, 나를 의지하라고 하지 않았으니 스스로 깨우치고, 혼자 힘으로 무소유를 실천하는 불제자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쌓지 말고 버리는 것,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선정에 드는 것을 선방에서 가르칠 예정이다. 여건이 되면 대웅전 뒤 대나무밭에 초조대장경을 모셨던 장경각도 새롭게 복원할 뜻은 갖고 있으나 아직 요원하다. 지자체 문화재청 문화계 인사들이 힘을 합치면 초조대장경을 모신 부인사를 그 역사에 걸맞은 성지로 탈바꿈시키는 일, 멀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글·최미화기자 magohalmi@msnet.co.kr

사진·정우용기자 vin@msnet.co.kr

◆ 초조대장경 되찾을 수 있을까

부인사라는 절명은 고려사 고려사절요에서는 符仁寺로 쓰고 있으나, 조선시대 기록에는 夫人寺로 적고 있다. 부인이란 신라시대에 왕비를 부인이라 일컫는 것이나, 왕비가 아니라 실은 선덕여왕을 기린 절로 경내에 숭모전이 있다. 숭모전에는 선덕여왕 어진이 봉안되어 있다.

1011년부터 목판에 새기기 시작한 초조대장경이 부인사에 봉안되어 있었던 것은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이규보는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서 몽고병의 제2차 침입 때 방화로 불타버린 이 초조대장경의 상실에 대해서 "심하도다, 달단(達旦=몽골)의 침략이여!… 부인사에 갈무리했던 대장경 판본도 남김없이 쓸어버렸으니 아! 여러해 쌓은 공이 하루아침에 재가 되어 나라의 큰 보배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고 애석해하고 있다.

몽골 병사의 침입으로 부인사에 모셔져 있던 초조대장경의 판목은 모두 불타버렸으나 그 인쇄본은 일본 교토 난센지(南禪寺) 등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난센지는 일본 임제종 남선파의 대본사로, 1291년 가매야마(龜山) 천황이 별궁을 절로 하사하면서 개산되었다. 난센지는 경도에 수백 개의 절 가운데 5개의 큰 절(五山)을 초월하는 엄청난 규모의 절로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구시가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기념하여 2011년 프로젝트를 추진하려면 우선 팔공산 부인사에 모셔져 있던 초조대장경의 인쇄본을 난센지 등에서 확보하려는 노력과 장경각 복원에 대한 의지를 보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부인사 측에서는 현재 법당 뒤 대숲에 장경각을 지을 부지가 있다고 전하고 있다.

최미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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