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방법으로라도 사제성소를 포기하려고 애써보았지만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제가 사제가 되길 원하셨다면, 왜 많은 사람들은 제가 사제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제가 사제가 되길 원하시는지,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으심에도 불구하고 제 뜻으로 사제가 되길 원하는지…, 갈등과 번민 속에 몸과 마음이 너무 아파 며칠 동안을 눈물로 지냈습니다…."
아시아 최초로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면서 사제로 서품받은 박민서(39) 신부가 지난 주말 대구 대명성당과 농아선교회에서 각각 집전한 미사는 종교와 종파를 초월한 감동의 무대였다. 이날 수화통역은 서울가톨릭신학대학에서 박 신부와 함께 동문수학하며 지난 6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으로부터 같이 사제로 서품받은 이창원 신부가 맡았다.
박 신부가 대구에 와서 가장 먼저 대명성당을 찾은 것은 지난해 사제 서품을 준비하면서 대명성당 신도들의 모금활동 등 도움을 받은 것이 인연이 됐다. 대명성당 강순건 주임신부는 우리나라에서 농아선교를 최초로 시작한 독일인 까리타 수녀가 활동했던 서울 도남성당 출신. 따라서 박 신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남달랐고, 이런 마음이 신도들에게 파급되었던 것이다.
사제의 꿈을 지녔던 박 신부의 지난 22년간의 삶은 일반적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승리'로 기록될 만하다. 하지만 박 신부는 "이는 개인적인 인간승리가 아니라, 절망과 좌절에 빠진 내게 용기를 주기 위한 수많은 이들의 기도와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말했다.
홍역을 앓던 두 살 때 항생제 부작용으로 청력을 잃었고 말도 할 수 없게 됐다. 조롱과 멸시 속에 일반학교를 다니면서도 성적이 우수했던 박 신부는 경기도 고입 연합고사에 합격하고도 '농아'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부당하는 시련을 겪었다.
"너는 희망이 없다. 너는 우리와 다르다."는 학교 친구들의 조소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진학한 '농아학교'에서 새로운 운명이 찾아왔다. "운보 김기창 화백처럼 훌륭한 화가가 되라."고 격려해 준 미술학원 원장을 통해 천주교를 알게 된 것이다.
그 미술학원 원장도 농아였다. 그리고 농아학생을 위한 주일학교에서 정순오(53·서울가톨릭농아선교회 담당 사제) 신부를 만나면서 '사제의 꿈'이 싹텄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농아가 신부가 될 수 없었다. 이렇게 절망하고 있을 때 미국의 '농아신부 1호'였던 토마스 콜린 신부가 내한, "미국에선 농아도 신부가 될 수 있다."며 길을 일러주었다.
새 희망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미국·영국·뉴질랜드·브라질·남아프리카공화국 등지를 통틀어 전 세계에서 농아 신부가 14명뿐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박 신부의 유학생활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영어를 새로 배워야 했을 뿐만 아니라, 수화도 다시 배워야 했다.
한국어 수화와 영어 수화는 90% 이상이 달랐기 때문이다. 세계 유일의 농아 종합대학인 갈로뎃대학(워싱턴 D.C 소재)에서 4년 만에 철학사와 수학사 학위를 받고 뉴욕 성요셉신학교로 진학했지만 농아 신학과정이 1년 만에 폐지돼 성요한대학원으로 옮겨 석사학위를 받고 유학 10년 만인 지난 2004년 귀국했다.
"영어를 배우면서 전문용어가 많은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많았지만, 한국에서 많은 이들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생각에 다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박 신부는 " 공부를 마친 뒤 '정말 하느님께서 나를 이끌어 주셨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앞으로도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신뢰하면서, 하느님께서 주신 순명에 따라서 내가 가야할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이날 대명성당에는 가톨릭 신도들은 물론 불교 신도들도 찾아와 박 신부의 강론을 함께 들으며 아시아 최초의 농아신부 탄생을 축하해 주었다.
석민기자 sukm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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