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 아코디언 예찬

소설가 정비석은 교과서에 산정무한이라는 산문을 썼다. 금강산을 노래하는 예찬의 글이다. 어느 옛 필부는 '조침문'이라는 조의문을 썼다. 한때 동고동락했던 바늘이 본인의 실수로 부러진 것을 애통해하는 글로, 알고 보면 바늘에 대한 예찬의 글이다.

예찬에 관한 글이 어디 이것뿐이랴. 약동하는 청년의 심장을 두고 '청춘예찬'이라는 글도 나왔다. 세상이 이처럼 예찬의 글들로 가득 찬다면 정말 근사할 것이다. 그러나 걸러지지 않는 예찬의 글들이 너무나 많아 예찬에도 옥석을 가려야 할 것 같다.

이제 나의 '아코디언 예찬'을 시작해 본다. 나는 아코디언을 접하기 전까지는 소프라노 색소폰을 불었다. 이 악기로 케니지 곡들을 불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천상의 거리를 활보하기도 하고, 슬픔에 잠겨 눈시울을 붉히기도 한다.

특히 케니지 곡의 '포에버 인 러브'를 불렀을 때 이 세상에 영원한 사랑이란 음악과 악기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아주 오래전 고교 2학년 시절, 총각으로 갓 부임한 선생님이 있었다.

결혼을 한다기에 소감을 물었더니 '결혼할 처녀를 악기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악기의 잘못된 연주 책임은 자신에게 있을 것이라고 자신만만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나 악기란 연주자의 의도와 동떨어지게 반응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 그리 긴 시간을 요하지 않는다.

요즈음 풍속도야 또 다르겠지만, 결혼 초기에는 남편에게 순종적인 여인이라도 세월이 갈수록 연주자와 악기가 동일시되다가 나중에는 악기가 연주자를 리더하기 일쑤이다. 마치 술이 술꾼을 지배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내가 택한 색소폰 악기는 주인에게 잘 순종했다. 내가 그를 싫어하여 저만큼 거리를 두고 밀쳐놓으면 자기를 불러 줄 때까지 불평 없이 가만히 있는 자태가 얄밉기까지 했다. 악기에 손을 대고 '도' 소리를 불면 '도' 소리를 냈고, 틀리게 불면 정직하게 틀린 소리를 냈다.

멋있게 연주하면 그만큼 아름다운 멜로디로 화답을 한다. 그러다가 최근에 아코디언을 접하고 부터는 색소폰에 대한 애정이 자꾸만 식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란 적도 있다. 토사구팽인가. 대다수 악기가 지니는 공통점의 하나는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다. 색소폰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색소폰은 특히 자기만 위해 달라는 욕심이 대단한 악기다. 주인의 입을 독차지해 자기만 불어주기를 원하고 오로지 멜로디만 연주하기를 고집하며 화음내기를 거부한다. 하기야 태어날 때부터 그런 구조를 가지고 있으니 마냥 탓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지만….

음색이 너무도 독특해서 타 악기와의 합주를 거부하니 색소폰이 오케스트라에서 항상 왕따당하는 이유가 아닐까. 혹자는 아코디언을 약장사들이 연주하는 천한 악기라 폄하하기도 한다. 그것은 아코디언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다.

아코디언은 멜로디와 화음을 동시에 연주할 수 있는 악기요, 표현력이 월등해서 한 사람만의 오케스트라라고도 할 수가 있다. 섬세한 강약, 아름다운 선율, 바람통의 조작에 의해 이루어지는 숨은 비결을 아코디언만이 갖고 있는 장점이다.

또한 연주자의 입을 봉하지 않아 성악으로 직접 노래할 수 있는 기회도 부여하고 있어, 그야말로 연주자의 뜻과 감정을 그대로 옮겨 놓을 수 있는 악기인 것이다. 사랑은 이별을 동반하는 까닭에 '눈물의 씨앗'이라고도 표현한다.

나는 아코디언을 통해 눈물의 씨앗을 노래하고 청춘의 열정을 표현하며 변하지 않는 사랑을 담아낸다. 연주할 때면 항상 주인의 가슴 위에 자리하고 있으니 주인의 희로애락이 아코디언을 통해 고스란히 표출되는 것이다.

마치 의학계에서 사람의 심장상태를 심전도기계를 통해 그래프로 나타내는 것처럼 주인의 심장박동을 아코디언을 통해 음계로 표현하는 것이다. 늙어가는 노인의 아픈 다리를 자가용이 대신한다면, 심약해져 가는 노인의 가슴은 아코디언이 지켜준다고나 할까. 장차 아코디언을 둘러메고 노인회관에 나타날 내 자신을 그려본다.

김태준(수필가·경상병원 산부인과 과장)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