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성지를 찾아서] 천주교 성지⑭-봉화 우곡성지

200년만에 찾은 농은 홍유한이 걸었던 '수덕자의 길'

늦게 뜬 달이 서천(西天)으로 기울고, 동천에 개밥바라기별(샛별)이 유난히 빛을 발하는 새벽이면 봉화 우곡성지를 향한 그리움이 피어오른다. 십여 년에 걸쳐서 서너 차례 다녀왔을 뿐이지만, 내 마음속의 우곡성지는 지난 밤의 어둠과 혼란을 지켜보면서도 맑은 기운을 잃지 않은 금성과 같은 존재로 각인되어 있다. 다들 잠든 '조선의 밤'에 혼자 외로운 새벽별처럼 떠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천주를 향한 그리움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지켜내며 덕을 닦았던 한국천주교회사의 수덕자(修德者) 홍유한이 묻힌 봉화 문수산 우곡성지는 물론 생목숨을 바치고 은총의 피를 뿌린 순교 성지는 아니다. 하지만, 순교성지 못지 않은 소중함을 지녔다.

◈ 천주를 향한 자기만의 수덕생활

유학자였던 농은 홍유한(1726~1785)은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칠극과 천주실의를 통해 알게 된 일곱 가지 죄와 그를 씻는 덕행에 대해서 알게 된 이후 삶의 목표를 확 바꿔버렸다. 장원급제도, 높은 벼슬길도 관심사에서 멀어졌다. 오직 '천주처럼 덕을 닦고 절제하는' 수덕생활만 가슴 가득 차올랐다. 순교자도, 영세자도 아니지만, 안동교구에서 성지로 개발한 농은 홍유한의 묘소와 그 주변 농은 수련원은 한국천주교회의 독창성을 배태한 곳이어서 매우 소중하다. 한국천주교가 103위 순교성인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다른 나라들처럼 입국한 선교사를 통해서 믿음을 전달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첫 신자 이승훈이 북경에 가서 제손으로 신앙을 품어안은 자생력이 크게 작용했고, 그렇게 받아들인 천주교를 지키기 위해 순교자들의 피로 물든 은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 한국천주교의 자발성과 진정성의 싹은 이미 농은 홍유한에게서 품어지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지난 93년 10월 수덕자 홍유한의 묘지는 안동교구 한상덕 신부 등이 주민의 도움을 받아서 찾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처음 농은의 묘소가 발굴되면서 우곡성지 복원을 향한 여정은 시작되었다. 십여 년 전, 까탈막진 산비탈길을 타고 올라가본 우곡성지와 최근 다시 두어 번 가본 우곡성지는 천양지차로 달라져 있었다. 일일이 안동교구 봉화성당 교우들을 중심으로 두손으로 안아서 산마루까지 올린 석물이 묘역을 예쁘게 단장하고 있다.

◈ 200년 만의 절대 고독 털어내고 후예들과 악수를

안동교구에서 농은의 묘소 주변을 매입하고, 묘지 작업을 하던 중 진흙에 숯으로 '홍공지묘'(洪公之墓)라고 쓴 것이 발견되었다. 홍유한의 묘임이 더 확실해진 것이다. 비석을 세우고, 북부지구 성지개발위원회(위원장 김용기)가 발족되어 도로를 내고 안내판을 설치했다. 선종한 박석희 주교가 우곡 성지를 축성하였고, 순교자 현양미사를 봉헌하였다. 저 멀리 낙동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홍유한의 묘소로 오르는 길을 십사처가 세워져 있으며, 경사가 알맞아서 묵상기도를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주변에는 야양장과 사제관 피정의 집이 들어서 있는 명당에서 홍유한은 우곡성지를 찾아오는 믿음의 후예들과 '절대 고독'을 털어내는 '200년만의 인사'를 나누고 있다. 한국 가톨릭의 제3세기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홍유한은 1726년(영조 2년)에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창보, 모친은 창녕 성씨이다. 원고향은 안동 풍산으로 정조 외가(혜경궁 홍씨 친정) 집안이다. 신동으로 불린 농은은 벌써 예닐곱 살에 제자백가서를 모두 탐독하였고, 16세에 아버지의 당부를 따라 '성호사설'을 쓴 실학자 성호 이익의 문하에 들었다. 그후 20년 동안 성호의 제자로서 진리 탐구에만 정진하였고, 안정복, 체제공, 권철신 등과 깊은 관계를 가졌다.

일찍이 홍유한은 "학자라고 이름만 내세우는 것은 진정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이 아니다. 외모만 꾸미고 허명만 탐하여 진퇴의 지름길을 구하는 것은 곧 구차히 남의 담장을 넘보는 좀도둑과 같은 재주일 따름이다. 나는 이를 부끄러워하노니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만 하는 일 사이에 진실한 마음으로 실질적인 공부를 하는 것이 바른 학문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성호는 농은이 20세 되던 해(1745년)에 그 아버지에게 "재주와 성품이 마치 난초와 같다."는 글을 써보냈다.

◈ 저 높은 곳에서는 다른 길을 예정해 두었음일까?

그러나 저 높은 곳에서 농은이 가야 할 길을 학문이 아닌 다른 데에 두었음일까? 그때부터 농은은 독질(毒疾)에 걸려 1752년까지 사경을 헤맨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농은의 병을 걱정한 성호는 산천을 유람하면서 병을 다스려보라고 권했다. 부친이 돌아가시고, 서울 집을 팔아서 충청도 예산의 친척들이 있는 조용한 시골로 이사를 갔다. 아무튼 그는 1757년 이후 세상이 시끄럽고 부친이 사망하자 본격적으로 수덕생활을 시작하고자 서울의 가사를 정리하고서 충청도 예산의 여사울로 낙향하여 '칠극'에 의한 천주교 수계생활을 18년 동안 혼자 하였다. 축일표도 기도책도 없던 홍유한은 '칠극'에 의한 수계생활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7일마다 축일(주일)이 온다는 것을 알게된 홍유한은 매달 7일, 14일, 21일, 28일에는 경건하게 쉬면서 속세의 번잡한 일을 물리치고 기도에 전념하였다. 금육일을 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기름지고 좋은 음식은 먹지 않는다는 자율규칙을 지키기도 하였다. 1775년에는 예로부터 유학과 학문의 고장인 경상도 순흥(順興) 고을 구고리(현 경북 영주시 단산면 구구리)로 이사를 했다. 구구리에는 만년에 농은이 살던 유택지가 있고, 홍유한의 조부인 홍중명이 임금에게 하사받은 효자문이 가보로 내려오며 권일신과 주고받았던 홍유한의 친필 서찰들이 보존되고 있다. 이렇게 수덕생활을 하는 동안 정조는 두 번이나 홍유한을 스승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사양하였다. 오직 천주와 같은 길을 걷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권력도 부귀도 명예도 남김없이 버렸다. 그렇게 고독하게 수덕자의 길을 택한 홍유한은 1785년 1월 30일(음) 60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살다가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사후 봉화 문수산 우곡 골짜기에 안치되었다.

◈ 순교자 7명이나 배출한 수덕자 집안

한편 홍유한의 후손 중에는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순교자 권철신 암브로시오 집안과 7촌 조카인 순교자 홍낙민 루가, 홍재영과 이소사(홍낙민의 아들 내외), 103성인에 포함된 홍병주 베드로와 홍영주 바오로 등 7명의 순교자가 있다. 우곡성지 십자가의 길 입구에 들어서 있는 기도비는 노래한다. "주님, 저희를 위하여 온갖 수난을 겪으신 주님의 길을 묵상하며, 성모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는 우리들이 회개하고 언제나 주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글·최미화기자 magohalmi@msnet.co.kr 사진·정우용기자 vin@msnet.co.kr

◈칠극이란?…절제생활 표준 칠극대전의 약칭

수덕자 홍수한이 따라서 절제생활의 표준으로 삼은 '칠극(七克)'은 '칠극대전(七克大全)'의 약칭으로 스페인 출신 예수회 신부 판토하(1571~1618)가 지은 책이다. 이 책은 일곱 가지 죄악의 근원과 이를 극복하는 일곱 가지 덕행을 다룬 일종의 수덕서(修德書)이다. 1614년에 중국 북경에서 7권으로 간행된 이래, 여러 번 판을 거듭하였다.

이 책은 마테오 리치가 '천주실의(天主實義)'와 함께 일찍부터 들여왔고, 남인들을 천주교에 귀의케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성호 이익은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칠극'은 유학의 극기설과 한가지라고 전제하면서, 칠죄의 뿌리로 탐욕, 오만, 음탕, 나태, 질투, 분노, 색을 꼽았고, 칠죄를 극복할 수 있는 덕행으로 은혜, 겸손, 절제, 정절, 근면, 관용, 인내를 소개하고 있다. 성호는 '칠극'을 비교적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천주교와 유교가 윤리면에서 어느 정도 일치할 뿐 아니라, 때로는 천주교가 우월함을 은연중에 시인하였다. 그러나 성호의 제자인 안정복은 '칠극'이 공자의 이른바 사물(四勿)의 각주에 불과하며, 비록 심각한 말이 있다 하더라도 취할 바가 못 된다고 폄하하였다.

'칠극'은 1779년 소위 천진암 주어사 강학에서 남인학자들에 의해 연구 검토되었음이 확실하며, 일찍부터 한글로 번역되어 많은 사람에게 읽혔다.

최미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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