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낭만의 시대가 다시 오려나 봅니다

구글 검색 선호 출처로 추가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신작로 위로 눈이 내립니다. 마을에서 좀 떨어진 허름한 가게. 술도 팔고 밥도 팔고 과자도 팝니다. 버스 정류장 표시도 없는 정류장에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를 객이 서 있습니다. 폭설에 버스는 끊어진지 오래입니다. 허름한 재킷을 걸친 사내는 꿈쩍도 않습니다. 한복을 격식 없이 입은 젊은 작부가 가게 유리문을 들락거립니다. 한번은 개숫물을 쏟아내려고, 두 번째는 연탄재를 내놓으려고….

작부는 들락거릴 때마다 꼼짝 않고 서 있는 사내에게 말합니다.

"버스 끊어졌어요."

어느 지방 사투리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녀에게는 고향이 없습니다. 돌아가야 할 고향이 없기에 그녀는 어디든 머뭅니다. 사내는 대꾸하지 않습니다. 사내는 눈 쌓인 신작로를 멀리 바라봅니다. 버스는 오지 않습니다.

가게의 유리문을 열고 나온 작부는 빗자루를 탈탈 떨어내면서 말합니다.

"버스, 안 와요. 눈이 이렇게 쏟아지는데…."

여자가 딱하다는 듯 혀를 차며 가게 안으로 들어갑니다. 사내는 눈 쌓인 신작로와 어두운 하늘을 번갈아 바라봅니다. 그리고 작부가 사라진 가게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가게 안에는 손님이 없습니다. 폭설에 단골손님들은 끊어지고, 오도가도 못한 객과 할 일없는 작부가 마주 앉았습니다.

드럼통을 잘라 만든 식탁, 그 안에 오래된 화덕. 연탄은 다소곳이 타오릅니다. 연탄불은 빠르게도, 느리게도 타지 않습니다. 오늘 처음 만난 뜨내기와 작부가 사연을 가진 남녀임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천천히 타오릅니다. 두 사람은 지금껏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사연을 늘어놓습니다. 눈 내리는 밤, 끊어진 버스, 텅 빈 가게, 따뜻한 연탄불과 소주…. 악다구니 밖에 쓸 줄 모르는 술집작부는 눈물 글썽이며 사연을 늘어놓습니다. 낯선 두 남녀가 서로를 꼭 필요한 만큼 알아챌 무렵이면 연탄불은 희미해집니다. 이윽고 가게 안의 전등불이 꺼집니다.

어린 시절 잠결에 언뜻언뜻 보았던 'TV 문학관'의 한 장면입니다. 어른이 되면 꼭 저런 날, 저런 술집에 가서 한잔 마시고 연애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어른이 되고 보니 연탄도, 드럼통을 잘라 만든 식탁도, 뻘건 루즈 바른 작부도 사라지고 없습니다. '낭만의 시대'는 갔구나 했더니, 몇 해전부터 연탄이 다시 등장했습니다.

연탄화덕과 드럼통을 잘라 만든 식탁도 등장했습니다. 비록 만가지 사연을 늘어놓으며, 회한에 찬 노래를 불러줄 입술 붉은 작부는 없지만, 이만해도 다행입니다.

사진'정재호 편집위원 newj@msnet.co.kr

최신 기사

0700
AI 뉴스브리핑
정치 경제 사회 국제
최서원씨의 외부 병원 치료비 3천927만원이 국가에 의해 지급되었으나, 구상금 청구 절차가 지연되면서 최씨의 채권 소멸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
대구시는 2차 공공기관 이전을 위한 유치 전략을 구체화하며, 지역 산업과의 연계성을 강조하고 있다. 2023년부터 34개 기관을 대상으로 유...
청주의 한 초등학교에서 5학년 A양이 담임교사 B씨를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해당 장면이 SNS를 통해 확산되면서 파문이 일고 있다. ...
미국이 반도체에 대해 새로운 관세 체계를 마련하고 있으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에 따른 투자 압박을 받을 전망이다. 하워드 러트닉 미..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