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한국 국민만 있다.'
화교 2세 이모(69)씨는 2년 전 기억만 떠올리면 울화통이 치민다. 한 관광지 앞 매표소에서 '(65세)노인 할인'이라고 쓰인 안내판을 보고 돈을 내밀었다. 매표원은 "외국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면박했다. 한국에서 태어나 세금도 다 냈다고 따져봤지만 소용 없었다. "돈을 깎으려는 게 아니라 당연한 혜택을 받으려는 것뿐이었는데도 그것은 나만의 생각이었다"고 했다.
화교가 우리 땅을 밟은 지 한 세기가 넘었다. 우리와 현대사의 굴곡을 함께했지만 그들은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한국인이 되지 못하고 있다. 국내 화교들은 "100년이 지나도 우리는 여전히 이방인"이라며 한탄하고 있다. '차이나타운이 없는 유일한 나라' 한국. 우리 사회가 지닌 '다름'에 대한 포용력을 반영하는 잣대가 되고 있다.
◆영원한 이방인 화교
지난달 25일 대구 중구에 위치한 화교소학교. 개학 첫날이지만 학교는 썰렁했다. 전 학년을 다 합쳐도 학생은 46명뿐이다. 4학년은 방학 동안 1명이 미국으로 떠나면서 4명밖에 남지 않았다. 3학년 사안나(10)양은 "개학하니 3명의 친구가 학교를 그만둬 이제 7명뿐"이라며 그나마 남학생은 한명도 없다고 했다.
학생 수가 줄면서 화교사회를 떠받쳐주는 중요한 토대가 무너지고 있다.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600명이 넘었던 학생이 지금은 50명도 채 안 된다. 때문에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운영되는 학교 재정은 말이 아니다.
이는 교육여건의 악화와 교사의 낮은 보수로 이어져 교육의 질적인 저하를 초래하고 있다. 낮은 보수와 처우는 교사채용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왕문정 교장은 "대만정부의 지원이 교과서 정도로 미약해 학교 운영이 등록금으로 이뤄지는데 학생수가 크게 줄어 교사의 월급도 제대로 주지 못할 형편"이라고 했다.
그나마 최근 불고 있는 중국 열풍으로 유치부에 그나마 한국 학생들이 몰려 문 닫을 위기를 모면했다. 화교학교 관계자들은 "대만 학력만 인정되기 때문에 한국학생은 입학조차 하지 못한다"며 "한국학생들이 화교학교를 다닐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고 했다.
◆평생 외국인으로 살 바엔…
한때 5천명에 달했다는 대구의 화교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을 만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살기가 힘들다 보니 지금은 1천여명 남짓 남았어요."
경부선 철도 건설 노동자로 한국 땅을 밟은 선친이 국내에 정착해 살아 고향이 충북 옥천이라는 이세붕(72) 대구화교협회 상무는 '전 세계에서 화교가 가장 살기 힘든 나라'가 바로 한국이라고 강조했다. "2002년 영주권을 받기 전까지 한국에 머물려면 3년마다 출입국 관리사무소를 드나들어야 했죠."
외국인이라 취업은 엄두도 못 냈다. 식당을 차리는 게 전부였다. 돈을 벌어도 땅도 맘대로 사지 못했다. 주민세, 교육세, 각종 공과금 등 의무를 다해도 한국인이 받는 혜택은 하나도 누리지 못했다고 했다. "군대를 가지 않는 것 빼고는 의무는 똑같은데도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복지혜택은 전혀 못 받아요."
외국인등록증에 새겨진 뒷자리 첫번호(남-5, 여-6)로 인해 인터넷·폰뱅킹은 물론이고 핸드폰·인터넷 등 서비스 이용도 어렵다. 한국사람들이 대신 가입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화교들에게 교육제도는 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대구 수성구에서 한의원을 하는 총재신(54) 원장은 뒤늦게 얻은 막내 아들(13)을 지난해 한국학교로 전학시켰다. 부모 모두가 외국인이면 대학진학시 '특례입학'이 가능하지만, 자신처럼 부인이 한국국적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이런 혜택이 주어지지 않는다. 화교학교나 외국인학교를 다닐 경우 배운 게 다른데도 특례 혜택을 못 받아 대학진학은 꿈도 못 꿀 형편이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인과 결혼했는데, 오히려 외국에서 온 사람보다 대접을 못 받으니 말이 됩니까."
이런 모순적 제도로 화교 중에서는 엄마가 한국국적을 포기하거나 아버지가 대만국적을 포기하는 경우까지 있다고 했다.
소외된 삶은 결국 '원망'을 안고 한국을 떠나게 하고 있다. 안동에서 유명한 중국음식점을 운영했던 최모(65)씨는 우리 정부와 사회의 차별화 정책을 참다 못해 28년 전 한국을 떠났다.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의료계에 손을 대면서 많은 부를 축적했다. 이후 투자자로 변신한 그는 동남아 등 세계 각지에서 각종 개발에 자금을 쏟아붓고 있지만 투자 목록에 한국은 없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임상준기자 zzu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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