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인간조건

지난달 초 10년 만에 다시 런던을 찾은 나는 2000년 봄에 발전소를 리모델링하여 개관한 테이트 모던 미술관을 둘러보게 되었다. 운이 좋게도 나는 그곳에서 1월 초부터 4월 말까지 열리는 후안 무노즈 회고전을 볼 수 있었다. 2001년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에 48세의 나이로 죽은 스페인 조각가 무노즈는 1980년대 중반부터 특정한 건축적 환경에 맞춰 설치한 특이한 인물상들로 인해 '드라마틱한 조각설치가'로 국제적인 입지를 굳혔다. 가공과 실제 세계 사이를 밀고 당기는 긴장감 위에 구축된 그의 예술세계는 군중 속에서 철저하게 고립된 인간상의 대비를 특이한 방식으로 연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회고전에는 무노즈의 작품들 중 그동안 유럽 여러 도시의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를 통해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many times'도 포함되어 있었다. 1999년에 제작된 합성수지 제재의 이 작품은 수십 명의 중국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는 정경을 보여준다. 전제주의를 조롱하듯 획일적으로 헐렁한 마오 복장을 한 회색 군상은 이 작품이 제작될 무렵 세계 미술계에 불어 닥친 거대한 중국미술 바람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이 인물상들은 하나같이 시원하게 밀어버린 머리 스타일로 입 꼬리를 올린 채 웃고 있지만, 어느 것 하나 똑같은 표정이나 자세는 없다. 일견 관람자들은 서구인들에 비해 자그마한 신장의 중국인들을 지배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관람자들이 수많은 중국인 무리 사이를 떠돌아다니다 보면 점차 그들의 속을 드러내지 않는 미소와 은밀한 대화 속에 빨려들어가게 되고, 어느덧 친숙해 보였던 상황이 갑갑해지기 시작하면서 기묘한 느낌에 빠져들게 된다. 즉 의기양양했던 관찰자에서 공동체로부터 '자기상실'된 사람의 위치로 전도되어 버리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그림자와 입'과 '그림자를 향하여'에서 연출된, 텅 빈 방 한구석에서 자신을 위압하는 거대한 그림자를 향해 독백을 하거나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현대인의 고립된 상황은 처절하기까지 했다. 무노즈가 각색한 상황은 절망과 공포의 극한 상황 속에 처한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 그리고 부조리라 규정지을 수 있는 이 세계와 인간의 관계를 섬뜩하리만큼 리얼하게 표출했다. 자신의 운명과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무노즈의 인물상은, 자코메티의 헐벗은 인물상처럼 척박한 '인간조건'을 극복하는 인간의 위대함을 나타낸다. 갤러리분도 아트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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