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일 국립국어원은 대중매체에 나타나는 성차별적 언어표현 5천87개를 발표했다. '부엌데기' 같은 '특정한 성의 비하', 'S라인' 같은 '선정적 표현' 등 대략 5개 유형으로 나눠 조사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중 유독 내 눈을 끄는 것이 있었다. 바로 '불필요하게 성을 강조한 것'에 속한 '여의사'란 용어였다. 나는 언어학자도 아니거니와 여성정책을 연구하는 사람도 아니기에 과연 '여의사'라는 말이 성차별적인 것인지 알 도리는 없다. 그러나 내 기억은 저절로 20여년 전의 어느 화창한 봄날로 되돌아갔다.
내가 지방의 소도시 병원에서 외과 과장 역할의 파견 근무를 할 때였다. 역할이야 과장 대행이었지만 나는 레지던트였고 당시 내과의 과장님은 '여의사'로 당당한 전문의였다. 그런데 읍내에서도 한참 떨어진 시골에서 오신 할머니, 할아버지(사실은 무심코 '할아버지'를 먼저 적었다가 아차! 하고 순서를 바꾸었다)께서는 내과 과장님께는 '아가'라고 부르고 나에게는 '원장님'이라고 불러서 무척 민망하고 죄송했다. 심지어는 몰래 진료과를 바꾸어서 내게 다시 오시는 어른들도 계셨다. 그러니 그 당시에는 '여의사'라는 말은 확실히 성차별적인 표현이었을 것이다.
웃지만은 못 할 옛 기억에서 다시 현재로 되돌아오자. 다른 과야 내가 일일이 알 수는 없고 다만 내가 속한 외과의 경우만을 살펴본다. 요즘은 수술을 하다 보면 나를 빼고는 간호사는 물론이고 마취과 의사, 외과 의사 모두가 여자인 경우가 흔히 있다. 나만 외로운 '청일점'인 셈이다. 몇년 전 만해도 수술방 안에서 나만 남자인 것이 나 역시 생소하고 신기해서 사진까지 찍어 놓았을 정도였지만 이제는 너무나 익숙하다. 물론 아직도 '다른 과는 몰라도 외과는 여자가 하기엔 좀…'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외과에는 격언처럼 전해오는 '훌륭한 외과의사의 조건'이란 것이 있다. 독수리의 눈(예리함)과 사자의 심장(담대함), 그리고 숙녀의 손(섬세함)이 그 세 가지 조건인데 일단 여의사는 '손' 한 가지는 원천적으로 충족이 된다. 사실 수술이란 것이 공사장에서 자갈이나 모래 옮기듯 완력이 필요한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냉정한 판단에 따라 잘라내고, 꿰매고, 연결하는 것들이 복합된 일련의 머리와 손작업인데 여자에게 더 어울린다면 몰라도 더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래서 외과에서는 나를 포함한 남자 의사들이 '여의사'들의 역할에 만족을 넘어서 오히려 긴장하고 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일부 개원의의 경우에는 간판에 '여의사'라는 것을 일부러 명시해 놓은 곳도 있는 실정이다. 거기에다 의과대에서는 이미 여학생의 비율이 남학생을 앞질렀다. 그렇다면 요즘 같아서는 '여의사'라는 용어는 오히려 남자 의사들을 차별하기 위한 말로 들릴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여의사'라는 말이 갈수록 무섭다.
정호영 경북대병원 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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