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한국인의 화병(火病)

1996년 미국정신과 협회는 한국인만의 특별한 질병을 명명했는데 그 이름은 꽤나 익숙한 '화병'(hwa-byung)이었다.

성장과정에서 시시콜콜 속마음을 표현하면 무게 없고 가벼운 사람인 양 취급받기 십상이었고, 도저히 못 참아 표현할라 쳐도 도무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할지 몰라 참아버린 적이 한두 번이었던가. 이렇듯 참고 또 참음을 반복한 것이 무서운 '화병'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온 것이다.

요즘 현대인들은 불황과 과거에 없던 복잡한 문제들로 인해 스트레스 수치가 사상 최고의 상한선을 치며 힘들어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덩치 커진 우리의 '화병'들을 어디서 어떻게 치료받고 해소하고 있을까하는 의문이 생긴다. 원시 토속신앙과 샤머니즘 문화 탓일까? 아니면 심리상담에 대한 어색하고 거북스러움 때문일까? 다수의 한국인은 색다른 장소, 색다른 상담자를 찾아 나선다.

주변의 추천을 받고 찾아간 모 철학관, 모 무속인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구체적인 솔루션을 청한다. 무속인은 귀신같이 문제를 속속 꿰뚫어 보고 '너는 이런 이유로 지금껏 힘들었지만, 그것이 액땜으로 작용했기에 모월모시부터는 좋은 일만 생길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준다. 그 희망찬 메시지에 비로소 예기불안을 걷어내고 솜털처럼 가벼워진다.

약한 인간인고로 누구나 힘들고 지치고 때로는 무너진다. 미래를 알 수 없다는 불안감과 알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한방에 시원하게 해결해주는 한국인 맞춤형 상담이라 많은 이들이 여기에 의존하고 있다.

조선시대, 어린 나이에 청상과부가 된 종갓집 맏며느리가 있었다. 어느 날 이름 모를 병에 다 죽어가자 의원을 전전하다 마지막으로 무당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이 무당은 동네광장 공개된 장소에서 한판 굿을 벌인다. 힘없이 서있는 불쌍한 며느리에게 무당은 말한다. "나는 네 마음 안다. 새벽 개는 짖기라도 하지, 새벽닭은 울기라도 하지, 평생 숨 한숨 못 쉰 채 매일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종종걸음으로 쫓는 네 괴로운 심정, 나는 안다."

그 진정한 공감 한마디에 평생의 한과 설움이 봇물 터지듯 끝없는 통곡으로 쏟아져 나오고, 지켜보는 청중의 '그래, 맞아.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속이 시커멓게 문드러졌을 거야' 집단적 공감대가 형성되는 수용적 분위기에서 그녀가 진정한 카타르시스를 느꼈고 뒤에 병이 깨끗하게 나았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여태까지 참는 것이 미덕이려니 여겨 화를 억누르고만 있었다면 지금부터는 좀더 귀히 여겨 자신의 마음에 귀 기울여보길 바란다. 친구에게 속내를 털며 위로받는 것도 좋지만, 만약 힘들다면 훈련된 전문상담가를 찾아가길 적극 권한다. 당신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김은지(경산 문화의 집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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