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조두진의 책속 인물 읽기]조명이자 피사체인 특별한 산초

몽상가 돈 키호테는 산초 빤사를 시종으로 꼬드기면서 '손에 넣는 섬 중에 하나를 주겠다'고 약속한다. 산초는 이렇게 답한다.

"돈 키호테님. 피나는 결전으로 손에 넣으신 섬을 저에게 다스리게 해 주십시오. 그 섬이 제 아무리 크더라도 여태까지 이 세상의 섬들을 다스린 일이 있는 어느 누구 못지 않게 훌륭히 다스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요."

그렇게 길을 나선 두 사람은 어느 날 수도사 일행을 만난다. 스스로 편력기사를 자처하는 돈 키호테는 "저 시커멓게 보이는 자들은 저 마차에다 공주를 유괴해 가는 요술사들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내 있는 힘을 다하여 이 나쁜 놈들을 무찔러버려야지."

돈 키호테는 수도사 일행 앞으로 다가가 "이 극악무도한 놈들, 그 마차에 태워 강제로 납치해 가는 귀부인을 냉큼 풀어놓지 못하겠느냐! 만약에 내 말을 듣지 않을 때엔 네놈들의 악행에 대한 당연한 대가로 당장 죽음을 면치 못할 테니 각오하라!"

수도사들은 자신들이 악당이 아니며, 수도사라고 밝힌다. 그러나 자기확신에 빠진 돈 키호테의 귀에 들릴 리 없다. 돈 키호테는 막무가내로 칼을 빼들고 덤벼들고 수도사의 하인들을 두들겨 팬다. 돈 키호테는 무고한 사람을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다가 그 자신도 귀에 작은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린다. 수도사 일행이 떠나자 산초는 돈 키호테의 귀에 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배낭 안에서 삼실 부스러기와 흰 유약을 꺼낸다.

이때 돈 키호테는,

"내가 그 피에라브라스 향유를 한 병 만들어 가지고 오는 것을 잊지만 않았던들 이런 약은 필요 없었을 텐데. 그래 단 한 방울만 있었더라면 시간도 절약되고 다른 약이 필요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야."

산초 빤사는 "대체 그건 어떤 병이며 어떤 향유입니까?"라고 묻는다. 돈 키호테는 "나는 그 처방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만, 이것이 있으면 인간은 죽음을 겁낼 필요도 없고 웬만한 상처로 죽을 염려도 없지. 따라서 내가 이것을 조제하여 그대에게 주는 날이면 설혹 어느 싸움터에서, 이런 때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하나, 내 몸이 한가운데서 두 동강이 난 것을 목격하더라도 그대는 침착하게 땅에 떨어진 한쪽을 재빨리 피가 굳기 전에 꼭 맞나 안 맞나 조심해서 안장 위에 남아있는 나머지 반신에 맞추어 붙이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내가 방금 말한 향유를 단 두 방울만 나에게 먹여주면 된단 말이다. 그러면 내가 사과보다 더 싱싱하게 되살아나는 것을 그대는 볼 수 있을 거다."

산초는,

"그렇다면 약속하신 섬 다스리는 일은 바로 이 시간부터 그만두시고, 제가 여러 가지로 (당신을) 모신 노고의 대가로 그 세상에도 보기 드문 묘약의 제조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 외에 다른 건 아무 것도 바라지 않겠습니다요. 어디를 가나 1온스에 2레알씩은 받을 테니까요? 그런데 그걸 만드는 데 돈이 많이 들어갑니까?"

"3레알만 있으면 3아숨부레(약 6천 리터)는 만들 수 있을 게다."

"아이고, 나으리 그렇다면 저에게 그걸 만드는 방법이나 알려주십시오."

물론 그런 비법은 없다. 이는 다만 돈 키호테의 망상적 기질, 허풍이 만들어낸 상상의 묘약일 뿐이다. 이 장면뿐만 아니라 돈 키호테와 산초의 가치관은 곳곳에서 충돌한다. 잘 알려진 대로 돈 키호테는 편력기사며 낭만적 몽상가이다. 그는 이미 종말을 맞은 '기사도 정신'을 상징하는 인물이며 팍팍한 세상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 독자들에게는 '로망'이다.

돈 키호테가 우리의 '로망'이 된 데는 산초 빤사의 역할이 크다. 보편적이고 실용적인 가치관을 지닌 산초의 언행이 배경으로 작용한 덕분에 돈 키호테의 낭만적인 언행이 두드러지는 것이다.

조연인 산초 빤사는 주연을 빛나게 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빛을 발한다. 돈 키호테의 언어는 산초의 언어가 아니면 드러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산초 빤사가 아니라 돈 키호테와 꼭 같은 인성을 지닌 인물이 시종노릇을 했다면 소설 '돈 키호테'는 쓸모가 훨씬 적은 작품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조연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조연의 성실한 삶이 주연을 빛나게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조연 자신을 파멸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살리에르의 모차르트에 대한 경쟁심은 오히려 처참한 파멸을 확인하는 경우라고 할 만하다.

살리에르는 모차르트와 경쟁했고 그 결과 그의 남루한 삶은 모차르트의 화려한 죽음 앞에 바치는 국화꽃으로 격하됐다. 살리에르와 모차르트는 같은 성향의 인물이며 다만 재능의 정도가 달랐을 뿐이다. 이에 반해 산초 빤사는 돈 키호테와 경쟁관계에 있지 않다. 그는 자기만의 색깔을 드러냄으로써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이 된다.

누군가는 주연이고 누군가는 조연일 수밖에 없는 세상. 못마땅한 일이지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며, 누구의 탓도 아니다. 산초 빤사는 단 한번도 '왜 하필 나야. 내가 어째서 조연이어야 해?'라는 식으로 묻지 않았다.

관객(독자)의 입장에서 나(산초)는 조연일 수 있다. 그러나 내(산초) 입장에서 주연은 나다. 내 삶이 아무리 남루해도 나는 언제나 주연일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위치를 관객의 입장으로 정의할 때, 나의 경쟁상대를 내가 아닌 상대에게 둘 때 나는 주인공이 아니라 무대 위의 스타에게 쏟아지는 '톱 라이트'에 불과할 수도 있다. 산초 빤사는 주인공을 비추는 '톱 라이트'인 동시에 그 자신이 피사체인 특별한 인물이다.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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