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생각을 한 적이 많았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들고 이렇게 슬픈가?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자 더욱 슬픔의 양은 많아지고 슬픔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많았다. 왜 나만 이렇게 아프고 이렇게 흉터로 마음과 몸을 채우는가? 그렇게 생각하자 흉터는 줄어들지 않고 더욱 늘어났다. 왜 슬픔 뒤에는 기쁨이 오지 않고 다시 슬픔이 오는가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시간은 기묘한 힘으로 나를 지배했다. 난 내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길을 걸어가는 작은 존재에 불과했다. 묘한 안도감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슬픔이나 흉터, 그리고 상처들이 내 몫이 아니라 시간의 몫이라는 깨달음. 그러자 내 몸을 지배하던 슬픔이나 상처, 흉터들이 허깨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슬픔, 상처, 흉터가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 이후에도 신기하게도 그것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내 속에서 숨을 쉬며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그건 시간의 몫이었으므로 난 그냥 시간 속으로 걸어가면 그만이었다.
모든 문을 다 걸어 잠근, 남해 금산 돌의 풍경 속. 비워두는 사랑법을 깨달으면서 한편으로 내 속의 아집을 지웠다. 역시 나에게는 그 길이 어렵다. 이성복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느 순간 시를 쓰는 방법을 완전히 까먹어버렸어요. 도무지 어떻게 시를 썼었는지 기억이 안 나더라고. 하도 답답해서 주위 사람들한테 '대체 당신은 시를 어떻게 씁니까?'하고 물어 봤을 정도라니까. 그런데 내가 그렇게 물으면 황당해하는 게 대부분이고 심할 땐 기분 나빠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시 좀 씁네 한다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물어보니까 '이 사람 누구 약 올리나?' 싶었을 법도 하지. 한데 정말이었거든. 도무지, 도통 시를 어떻게 써왔는지 알 수가 없었고, 내가 무엇을 쓰고 싶어하는지도 몰랐어." 시인의 말은 시를 쓰는 것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었을 게다. 시인은 살아가는 방식과 모습을 이야기한 것일 게다. 내가 집착하던 모든 대상으로부터 나를 비우고 대상을 떠나는 그것이 바로 나를 채우고 너에게 가는 길임을. 그게 진정 아름다운 길임을. 시인은 나랑 멀지 않은 곳에 산다. 그런데 여전히 시인과 나는 멀다. 내 보잘것없는 삶의 외면적 형상은 물론 어리석은 내면적 본질도 그에게 닿기에는 너무나 먼 곳에 있으니까. 그것이 참 슬프다.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이성복, '그 여름의 끝' 전문)
시 참 좋다. 이성복의 시를 읽고 있으면 이런 소리가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온다. 내가 내가 아니라 이미 이성복의 시 속에 내가 산다. 강요하는 흡인력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빠져 들어가는 무엇. 내가 자주 쓰는 단어를 빌리면 그야말로 '공감'한다. 1999년으로 기억한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라는 시집을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났다. 난 그 시집에 실려 있는 시보다는 시집 뒷 표지에 까만 문자로 박힌 아름다운 글에 그만 미쳐버렸다. '아픔은 살아있음의 증거'라고 했나. 아프게 살아가던 나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던 말인가. 아픔이 살아있음의 증거라니. 거기에 내 여름의 끝이 있었다. 하지만 여름의 끝은 단순한 끝이 아니었다. 수많은 폭풍우에도 쓰러지지 않고 우박처럼 붉은 꽃을 단 백일홍, 그리고 나의 절망도 장난처럼 끝났다.
그 여름의 끝에 시인을 찾아 집에서 10분 거리의 계명대학교를 들렀다. 방학이라 계시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결국 닫힌 연구실 앞에서 발걸음을 돌렸다. 영암관 앞 뜰에는 목백일홍이 막바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캠퍼스 배치와 건물의 구조와 정원의 색깔이 참 예쁘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인의 시를 다시 더듬었다. 늦여름의 따가운 햇살이 캠퍼스를 폭격하고 있었다. 문득 가슴 한쪽이 아팠다.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한준희(경명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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