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조두진의 책속 인물읽기]변신/김춘추

콤플렉스, 걸림돌인가 디딤돌인가

신라의 성골 왕족은 덩치가 컸다. 팔을 늘어뜨리면 무릎에 닿았다. 신라의 월성(궁궐)은 성골왕족의 체형에 맞게 지은 성이었다. 계단도 높고 의자도 높고 침상도 높았다. 화강암으로 만든 섬돌은 성골 왕들의 발아래 갈라지기 일쑤였다.

신라 사람들은 '자고로 왕은 덩치가 커야 한다'고 믿었다. 보통 체구를 가진 사람이 왕이 되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성골 왕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태평성세가 이어졌다. 내도록 풍년이 든 것도, 매일 아침 암탉이 알을 다섯 개씩 낳았던 것도, 마을에 아이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것도, 신라화랑들이 백전백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도, 가야국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린 것도, 무시로 신라를 괴롭히던 백제가 무너진 것도 덩치 큰 성골 왕들의 치세 덕분이었다.

신라사람들은 성골이었던 '선덕여제'가 지날 때마다 '이상하다, 이상하다'고 외쳤다. 선덕여제에게는 설명하지 못할 신력이 있다고 믿었다. 사람들은 그 실체가 무엇인지 몰랐고,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다. 그들은 다만 선덕여제의 능력을 흠모하며 '이상하다, 이상하다'고 읊조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바로 이런 시절에 진골 출신으로 덩치가 보통사람만한 김춘추가 제29대 왕에 즉위했다. 그는 김유신과 더불어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의 초석을 다진 사람이었다. 화랑 시절 김춘추는 훈련으로 단련된 몸, 신을 닮은 용모, 날렵한 몸놀림으로 당태종도 칭송했을 정도였다. 그는 아름다운 육체를 가진 사람이었다.

보통 덩치를 가진 김춘추가 왕이 되자 대신들은 그 평범한 덩치에 관해 쑥덕거렸다. 성골 왕의 추억에서 빠져나오기를 거부하는 백성들은 새로 즉위한 단신 왕에게 싸늘했다. 춘추공은 즉위했지만 권력으로도 무력으로도 백성들의 애정을 얻을 수 없었다.

김춘추는 정치기반을 강화하고 백성의 지지를 얻기 위해 변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변신은 성골처럼 덩치를 키우는 것이었다. 그에게 당태종도 칭송했던 날렵하고 단단한 몸은 자랑이 아니라 허약한 정치기반의 근거이자 콤플렉스였다.

김춘추, 무열왕은 종일 먹었다.

'네 명의 군사가 흰쌀밥이 가득 담긴 두 개의 함지박을 들고 왔다. 열 마리의 구운 꿩, 여섯 동이의 술이 뒤를 따랐다. 여인들은 밥을 둥글게 뭉쳐 황제의 입 안에 넣어주기 시작했다. 황제는 누운 채 입을 크게 벌려 밥덩이를 받아먹었다. (…) 게 누구 없느냐? 생치 여섯 마리를 더 굽고 쌀 한 말을 더 안쳐라. 여봐라, 돼지를 잡아라. 썰지 말고 통째로 불 위에 얹어 구워라.'

무열왕은 눈을 뜨면 기름진 음식을 먹었고, 해질 무렵이면 피똥을 싸며 혼절했다. 하루에 쌀 여섯 말, 술 여섯 말, 수꿩 열 마리를 먹어치웠다. 아름답고 용맹하던 무열왕은 끔찍하게 부풀어오른 살 더미 속에 파묻혔다. 눈알은 포도씨앗처럼 작았고, 콧구멍과 입술도 흔적만 남았다. 피부는 주름 한줌 없었고 온몸은 기름기로 출렁댔다.

무열왕 김춘추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 밑의 바위가 갈라지고 으스러지기를 바랐다. 성골들이 그랬던 것처럼. 김춘추는 일어서면 두 손이 양 무릎에 닿기를 바랐다. 그것이야말로 신(神)의 풍모였고, 신국 신라의 정통성 있는 성골 왕의 풍채였다. 그 자신 진골이며, 단신이었던 김춘추는 '거인'이 됨으로써 성골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백성들이 성골 왕을 향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향해서도 머리를 조아리기를 바랐다.

'변신'은 심윤경의 소설집 '서라벌 사람들'에 묶인 중편소설이다. 위 이야기는 신라사회의 중심이 성골에서 진골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치러야 했던 혼란과 김춘추의 불안·야심·살벌한 정치적 상황을 소설로 그린 것이다. 더불어 이 부분은 콤플렉스가 어떻게 사람을 성장시키고 파멸시키는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람에게 콤플렉스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디딤돌이 될 수도 있다. 김춘추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걸림돌로 인식하고, 콤플렉스를 깨트리고자 시도한 경우에 해당한다. 그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는커녕 파멸해버렸다.

콤플렉스를 파괴하거나 외면하려는 시도는 실패하기 십상이다. 차라리 콤플렉스는 숨기는 편이 낫다. 콤플렉스라는 '누추한 돌멩이' 겉에 비단보를 싸매려는 시도가 인생에는 긍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비단보를 처매고 처매고, 또 처매서 누가 봐도 돌멩이가 아니라 비단뭉치가 되는 게 낫다. 돌멩이를 감추기 위해 끊임없이 비단을 처매는 과정이야말로 성장의 과정이다.

극단적인 경우지만 여성이 남성중심사회에 콤플렉스를 느끼고 성전환 수술을 시도하거나, 남성적 생활태도를 몸에 배게 하는 것은 성공적인 결과를 얻기 힘들다. 여성에게 남성적 삶을 살도록 강제하는 실험도 있었는데,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여성은 남성을 흉내내기보다 여성의 특성을 최대한 키우고 이용하는 편이 낫다. 작은 고추는 덩치를 키우기보다 매운 고추로 변신하는 편이 낫고, 학력이 낮은 예술가는 뒤늦게 학위를 따기보다 예술적 완성도를 높이는 편이 낫다. 물론 그 과정이 훨씬 어렵고 그런 만큼 보상도 크다.

학자들 중에는 '콤플렉스는 깨트릴 무엇이 아니라 보상받아야 할 무엇'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김춘추는 덩치를 키워 콤플렉스에서 벗어났을 수도 있다. 그러나 비대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오히려 작은 덩치를 콤플렉스로 삼아 태평성대를 추구하는, 그래서 '성군'이 되는 쪽을 택했어야 했다. 무열왕 김춘추는 사람이 콤플렉스 때문에 파멸할 수 있고, 성장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조두진 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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