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를 웃도는 폭염이 작열하던 날, 가창댐을 지나 헐티재를 넘었다. 청도 비슬산 자락에 둥지를 튼 '외팔이 조각가' 정태원(55)씨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조각가라고는 하지만 정규 미술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었고, 다양한 작품을 만드는 것도 아니었다. 남성의 성기, 즉 '남근'만을 고집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짐작건대 세상과 어울리기 싫어서 산 골짜기에 집을 지어놓고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괴짜 같은 남자가 아닐까 싶었다. 사고로 한쪽 손을 잃게 된 사연도 궁금했거니와 무엇보다 '남근'에 연연하는 이유가 알고 싶었다.
◆둥지를 찾아가는 길
헐티재를 넘어서며 바람 냄새가 바뀌었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가 가쁘게 내쉬는 잿빛 숨결은 아득하게 사라지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풀과 나무가 은은히 내뱉는 향기로운 숨결이 가득 찼다. 풀과 나무가 땀을 흘린다면 아마도 이런 냄새일 터. 열기는 여전히 습기를 머금었지만 진득하게 달라붙는 불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잠시 녹음의 여유를 감상하는 사이 용천사(湧泉寺) 앞을 지났다. 동화사 말사인 이 절은 670년(신라 문무왕 10년) 의상 대사가 창건했다. 길 오른쪽에 자그맣게 '카페 둥지'라는 팻말이 보이고 2㎞라는 안내 글귀도 눈에 들어온다. 큰 길에서 2㎞나 떨어져 있다면 제법 깊은 골짜기겠구나 싶었다. 마주 오는 차가 겨우 비켜갈 너비의 콘크리트 길을 따라 한참을 나아가자 탁 트인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이런 곳이 있었나?' 하며 놀랄 만큼 전망도 좋고 바람도 시원한 그곳에 '카페 둥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통나무로 지은 그 집은 한눈에 '예쁘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하지만 정작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건물이 아니라 그 옆에 우뚝 선 바위였다. 사실 '우뚝 섰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여성의 은밀한 곳을 쏙 빼닮은 그 바위. 앞서 큰 길 입구에 '여근석'이라는 팻말이 붙어있던 이유를 그제야 알 성싶었다. '여근석'이라는 바위와 '남근'을 조각하는 작가. 뭔가 이야기가 통할 듯도 싶다. 카페에서 한참을 기다린 뒤 정태원씨를 만날 수 있었다. 밀짚모자를 눌러쓴 채 군용 탄창띠를 허리춤에 둘러 차고, 시커먼 장화를 신고 나타났다. 오전에 미리 전화했을 때 "밭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더니 정말 일하다가 부랴부랴 온 모양이다. 구석구석에 남근 조각이 가득한 그 카페에서 냉커피 한 잔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산의 향기
인터뷰가 늘 그렇듯 긴장도 풀 겸 뻔한 질문부터 던졌다. "왜 그렇게 산이 좋아요?"라고. 예상 답변은 이랬다. "사시사철 변화하는 모습이 좋고, 사람들과 달리 자연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그렇게 혼자서 고독하게 사는 것 아니겠는가." 이 정도를 기대했지만 그는 엉뚱하게도 대뜸 이렇게 말했다. "좋긴 뭐 좋아요. 그냥 사는 거지." 그렇다고 시니컬한 것도 아니었고, 턱도 아닌 질문이니 답할 가치도 없다는 식의 반응도 아니었다. 50대 중반이지만 그의 얼굴은 아이처럼 맑았고, 눈빛은 초롱초롱했다. 그런 얼굴로 답을 하니 시큰둥해도 곧이곧대로 들을 수밖에. "그럼 산이 안 좋다는 말이세요?" 오히려 기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그는 "허허" 웃으며 말을 풀어냈다.
"젊어서 무작정 산이 좋았어요. 결혼해서도 한번 산에 들어가면 열흘이고 보름이고 살다가 왔지요. 그런데 그게 지금 생각해보면 다 '도피'였어요. 무엇을 피하려고 했는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이 '산에 왜 가요?'라고 물으면 달리 할 말이 없으니까 '산이 좋아서요'라고 답했을 뿐이지 실상은 그저 산으로 도망친 거예요. 나이도 먹고 세월이 한참 지나고 보니까 이제서야 산의 향기를 알겠더군요."
결혼 후에도, 밥벌이를 위해 조그만 공장을 차린 후에도 그는 틈만 나면 산으로 도망쳤다. 한달에 세번씩 설악산을 찾았다니 그 열정만큼은 짐직할 만하다. "그때만 해도 설악산에 가려면 하루 종일 걸렸죠. 주중에 강원도 골짜기로 들어가는 열차에 손님이 있을 리가 없죠. 기차 승무원이 하도 심심해서 저랑 이야기를 나누며 갈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산에 들어가면 산장에서 며칠씩 지냅니다.(그럼 공장은 어떻게 해요?) 공장은 무슨, 조그만 가내수공업이었어요. 맡겨놓고 가는 거죠. 이런저런 생각하면 못가니까. 집에 갈 때쯤이면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그에게는 두 딸이 있다. 26살 큰딸 항아, 24살 둘째딸 미선. 대구 성서에 있는 원룸에서 지낸다)과 공원에도 가고 함께 놀아줘야지 하고 다짐하지만 이삼일 지나면 다시 산 생각이 나서 몸이 근질거립니다. 결국 다시 산으로 가는 수밖에요."
◆왼손과 목탁
그가 왼손을 잃게 된 사연 역시 들을 때엔 민숭민숭했다. 하지만 뒤늦게 돌아오는 길에 가만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어떻게 다치셨어요?"라는 물음에 "유압 프레스를 만지고 있는데 그게 내려와 버렸죠. 오작동이었어요"라고 답했다. 뭔가 더 들려줄 이야기가 없냐며 눈빛을 보내자 그는 "두 손이 다 있으면 좋겠지만 하나 없으니까 그런가보다 했죠. 원래 긴 꽁지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손이 하나 없으니 질끈 묶을 수도 없어서 박박 밀어버렸어요. 그거 말고는 별로."
손가락이 하나 없어져도 그 고통과 마음의 상처가 이루 말할 수 없을 텐데 한 손을 잃은 그는 너무도 태연스러웠다. 마치 손을 잃을 줄 알았다는 듯이. 그랬다. 세상사가 모두 그렇듯 나중에 알고 보면 서로 물고 물리는 질긴 인연의 끈이 있게 마련이다. 정씨를 영원히 떠난 왼손 역시 그랬다. 1970년대 중반 무렵, 덕유산을 찾아간 그는 향적봉 산장에서 주목 동가리를 깎던 허의준씨를 만났다. 조각을 가르쳐 준 스승인 셈이다. 몇 해 뒤 그곳에서 산꾼들 사이에 '정 도사'로 알려져 있던 정유근씨를 만났다. 지리산에서 역학을 공부했던 정 도사는 그에게 뜬금없는 제안을 했다. 주목 한 둥치를 가져다주면서 목탁을 깎으라는 것. 경남 하동에 있는 시각장애인 스님에게 갖다드려야 한다고 했다. 산꾼 선배의 말에 냉큼 그러겠다고 답을 했지만 대구로 돌아와서도 웬일인지 손이 가지 않았다. '남근'이면 벌써 깎았겠지만 엉뚱하게 목탁이라니. 정 도사는 대구로 찾아와서까지 목탁을 깎으라고 채근했지만 영 내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고가 났고 결국 한 손을 잃었다. 사고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올 것이 왔구나" 하며 나직이 내뱉었단다. 병원에 찾아온 정 도사는 "액땜 차원에서 목탁을 주문했었다"고 털어놨다. 손을 잃는 것이 그의 사주에 나와있는데, 목탁을 깎으면서 입을 작은 상처로 액막이를 하려 했다는 것.
한달 반쯤 지나 상처가 아물어 퇴원한 뒤 그는 목탁을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주목 동가리가 손을 대자마자 쩍하고 갈라져버렸다. 단단하기로 소문난 주목이 갈라지다니. 정 도사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하는 수 없다. 불교용품점에 가서 목탁을 하나 사서라도 스님께 보내드려라"고 했다. 그래서 안면도 없는 스님에게 그의 이름을 새긴 목탁을 선물했다. 둥지 카페 중간에는 나무 기둥 8개가 자리잡고 있다. 사주는 바꿀 수 없지만 팔자는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의 표시.
◆여근석과 남근
카페 둥지를 연 것은 지난 2001년 봄. 산꾼 선배를 따라 식당을 열고 싶어서 벌써 몇년 전 땅을 사둔 뒤 터닦이를 했다. 흙을 걷어내고 보니 커다란 바위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놀라울 만치 여성의 은밀한 곳과 모습이 닮아있었다. 물론 남근을 깎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이지만 한 손을 잃고 나서 한동안 작업을 쉬고 있었다. 집을 짓고 보니 바로 옆 여근석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음기'가 세면 조화가 맞지 않는 법. 결국 그는 다시 남근목을 조각하기로 마음 먹었다. 양 다리 사이에 나무를 끼우고 한 손으로 이리저리 돌려가며 남근목을 다듬어냈다. 나무 조각을 시작하면서 굳이 남근을 주제로 택한 까닭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자연의 이치가 그렇잖아요. 음양의 조화가 있고, 또 모든 것에는 뿌리가 있는 법인데 바로 남근이 그 뿌리라고 생각했죠. 아이들도 처음에는 '아빠가 왜 저런 것만 조각할까?'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자연스레 받아들이더군요. 그렇게 조각한 작품이 아마 수백 점은 넘을 겁니다."
카페 곳곳에는 거대한 남근목부터 휴대폰 고리로 쓸 만한 자그마한 작품까지 그득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는 대뜸 한 구석으로 가더니 이리저리 뒤져서 남근목 하나를 꺼내보였다. "제가 가장 먼저 만든 작품입니다. 소주잔이에요." 산을 좋아하고, 산에서 만난 사람을 좋아하고, 그 사람들과 술 한 잔 나누기를 좋아한다는 사람다웠다. 남근목 소주잔에는 줄이 달려있다. 산에 오를 때면 그것을 목에 걸고 간단다. 따로 술잔을 준비할 필요없어서 좋다나. 남근을 목에 걸고 터벅터벅 산을 오르는 그를 보고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손가락 만한 크기의 남근목에 줄을 매단 작품이 한쪽에 늘어져 있다. 스티커에 가격도 붙어있다. 휴대폰 고리라고 했다. "파시는 거예요?"라고 묻자 "허락도 받지 않고 하나씩 둘씩 가져가는 바람에 그렇게 해놨어요. 필요하다고 말을 하면 될 텐데 그냥 가져가는 바람에 가격표를 붙여놓았죠." 가격을 매긴 지 얼마 안 된 탓에 아직 하나도 팔지 못했다고 한다. 하기야 파는 것이 주목적도 아니었지만 살 사람이 불쑥 나설 것 같지도 않다. 휴대폰에 남근목을 걸고 다니면 그 또한 적잖이 이상해 보일 테니.
지금에야 남근석이나 남근목을 조각하는 사람들이 적잖지만 처음 그가 이 일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엉뚱함의 극치였다. 하지만 그가 만든 작품은 결코 외설스럽거나 민망스럽지 않다. 윤기나게 다듬어진 그의 작품은 앙증맞기도 하고, 때로는 힘이 느껴지기도 한다. 남의 눈만 의식하지 않는다면 하나쯤 가져다 놓아도 좋을 성싶다. 돌아오는 길, 그는 한사코 점심이라도 먹고 가라며 아쉬워했다. '카페 둥지'는 주말이면 수십명의 '비사모'(비슬산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정씨는 이 모임의 회장이기도 하다. 젊어서 무엇인지도 모르고 '도피'를 위해 산을 택했던 그는 이제 사람이 그리워 사람과 부대끼며 살고 있다. 산은 그런 곳이다. 그리움이 쌓이고 쌓여서 봉우리를 이룬 곳. 거기에 산이 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사진·정우용기자 v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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