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대학생이 되지 않은 사람들은 대학생이 되면 방학에 무얼 하고 싶어할까? 과거 한때 대학생이었던 사람들은 학창시절 방학을 떠올리면 어떤 일이 생각날까? 여기 올 여름방학을 뜻깊게 보낸 대학생들이 있다. 방학은 수업이 없는 기간이 아니라 '인생의 자율학습' 기간임을 깨달은 학생들. 20대 젊은이들의 소중한 땀방울을 어디에서 어떤 일에 뿌리고 왔을까? 그 보람찬 방학 속으로 들어가 본다.
정욱진기자 penchok@msnet.co.kr
◆우즈베키스탄 자원봉사 영남대 언론정보학과 김정훈
"약시콰리"('다음에 또 봐요. 안녕히 가세요'란 뜻의 우즈베키스탄 인사말)
우즈베키스탄 소녀 '라일라'는 떠나는 우리를 향해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영남대 해외자원봉사단 15기 우즈베키스탄 팀에 소속돼 지난 4일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도착했다. 최고 온도가 45℃에 육박하는 엄청난 더위 때문에 서있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모두가 사명감으로 견뎌냈다.
현지 도착 후 사흘간 적응기간을 가진 뒤 우리는 첫번째 봉사 장소로 향했다. 그곳은 바로 타슈켄트에 있는 'SOS 어린이집'이었다. 낯선 사람들의 방문에 수줍어하며 소극적으로 대하던 아이들에게 우리는 먼저 다가갔다. 이름을 묻고 사진도 찍으면서 아이들의 마음을 조금씩 열고자 노력했다. 창밖으로 수줍게 우릴 쳐다보던 12세 소녀 라일라. 그와의 첫 만남도 이렇게 시작됐다.
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해 태권도와 사물놀이·댄스 공연을 했는데, 다행히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풍선아트, 페이스페인팅, 물로켓 발사 등을 함께하면서 어느새 우리는 아이들의 언니와 오빠가 되어 있었다. 라일라 역시 나에게 점차 마음의 문을 열어갔다. 때로는 어리광도 부리며 나에게 매달리는 라일라를 보며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의 교류를 느꼈다.
이곳 아이들은 특히 기계에 관심이 많았다. 우리가 가지고 간 디지털 카메라는 단연 관심의 대상이자 신기한 물건이었다. 라일라 역시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디지털 카메라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무척이나 만져보고 싶어해서 동료의 카메라를 잠시 만지게 해주었더니, 내 사진만 백 장 넘게 찍어버리기도 했다. 그래도 내심으로는 '나를 이렇게 많이 생각해주는구나' 싶어 뿌듯하고 고마웠다.
7월 11일 아침, 우리를 배웅하며 정말 가슴 시리게 울어주던 아이들의 얼굴을 보니 차마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작열하는 태양과 뜨거운 바람보다 작별의 아픔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우리 차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드는 아이들을 뒤로 한 채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훔쳐야했다.
'SOS 어린이집'에서 만난 아이들은 '언어'는 단지 의사소통의 수단일 뿐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세상 어디서나 진심은 통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눈물을 훔치며 손을 흔들던 라일라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필리핀 문화교류 대구가톨릭대 법학부 천성종
올여름 '대구가톨릭대학교 필리핀 해외봉사 및 문화교류 G.A.S 팀' 학생대표로 뽑혀 필리핀을 방문했다. 처음 마닐라 공항에 도착했을 때, 숨이 턱 막히는 더위가 우리를 맞았지만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봉사지에서 본 빈민들의 삶은 입이 쩍 벌어질 정도의 처참함이었다.
우리가 첫 봉사활동을 한 곳은 필리핀의 농촌지역인 '타가이타이'였다. 비정부기관(Non-Government Organization)인 'Pag-asa센터'의 도움을 받아 빈민촌을 방문했다. 처음 본 빈민촌은 두려움과 놀라움 그 자체였다.
빈민가는 펜션과 골프장 건설 때문에 철거 통보를 받은 상태였다. 갈 곳 없는 이들의 표정은 막막함 그 자체였다. 필리핀의 빈민들은 밥을 사먹을 돈조차 없어 과일을 따다 먹으며 전전긍긍 살아가고 있지만, 부자들도 많았다. 조금만 도와주고 나눠준다면, 빈부 간의 갈등이 줄어들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 텐데 아쉬웠다.
하지만 빈민가 사람이 그렇게 어려운 생활환경 속에서도 아이를 입양하여 키우는 모습을 보고 느낀 점이 많았다. 우리는 장작을 패 주고, 물을 길러다 주고, 폭우로 무너진 집을 지어주고, 준비해 간 옷들을 나누어주는 일을 했다.
두번째 봉사장소는 필리핀 수도 마닐라였다. 수도라서 빈민이 적을 줄 알았는데, 더 많은 빈민이 강 주변에 살고 있었다. 불쾌한 악취가 진동을 했고, 온갖 벌레들이 날아다녔다. 우린 강 주변을 청소했다. 하루에 5분만 시간을 내 청소하면 훨씬 깨끗한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을 텐데, 포기해버린 필리핀 사람들을 보니 답답하고도 안타까웠다.
또 태권도 동아리에서 준비한 태권도 공연을 했다. 외국에서 태권도 공연을 보고 있으니, 없던 애국심도 생겨났다. 우리나라에 대한 자부심에 가슴이 뭉클하고 찡했다. 이번 해외체험 프로그램은 몸소 사랑과 봉사를 실천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준비과정이 힘들었지만, 교수님과 동료 덕분에 무사히 마무리 지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필리핀 봉사를 통해 '내가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특히 힘든 상황에서도 웃으면서 살아가던 몇몇 분들의 모습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함께 웃고, 함께 고생했던 봉사팀에 감사함을 전한다.
◆몽골 봉사활동 계명대 경찰행정학과 홍지선
2008년 여름방학. 나는 몽골로 12박 13일의 국외봉사활동을 떠났다. 해외 출국을 앞두고 나는 많은 생각에 빠졌다. 내 삶은 과연 무엇을 지향해 왔는가? 해외에 가서 어떻게 애국심을 고취할 것인가? 몽골에 가면 한국노래 한 곡쯤 가르쳐주고 와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실제 몽골에 도착해서 우리 봉사단이 제일 많이 한 일, 아니 우리가 한 대부분의 일은 '삽질'이었다. 놀이터 건설을 돕는다는 거창한 구호 아래 삽질을 통해 땅을 파냈다. 콘크리트를 만들어 부을 때도 역시 삽질의 연속이었다. 그 많은 흙무더기를 제거하고 화단을 조성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 차츰 든 생각이 '너무 힘들다. 해외봉사란 게 이처럼 머리 쓸 일도 없는 일을 기계처럼 반복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나? 이건 너무 비효율적이야'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랬다. 우리는 잠깐 쉬는 타임을 제외하고는 계속 삽질을 하거나, 혹은 삽질한 흙을 퍼다 나르는 단순, 반복적인 육체노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폭발한 나는 약간의 어리광을 섞은 어투로 이야기했다. "선생님! 이거 포클레인 하루 빌리는 게 빠르지 않나요?" 사실 "고급인력이 계속 단순 반복 작업만 해야 하다니요. 더 보람찬 뭔가를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라는 말이 나올 뻔했다.
그런 우리들을 향해 선생님은 딱 한마디만 하셨다. "봉사란 그 사람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다."
선생님의 이 말씀은 정말 회오리처럼 내 머릿속을 강타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봉사의 개념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무엇인가를 해주는 것이 봉사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깬 것이 봉사활동을 통해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이었다.
이번 활동을 통해 나는 생각했던 것 이상의 너무나 크고 많은 것들을 받았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마음가짐과 나의 작은 수고와 땀방울이 어떤 이에겐 큰 기쁨이 될 수 있다는 진리, 그리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 봉사팀 팀원들 간의 유대감. 함께 격려하고 위로했던 이번 활동기간은 내 생애 있어 영원히 잊지 못할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농활의 추억 경북대 법학부 임선영
고등학교 시절, 대학에 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을 했다. 대학에 가면 유럽배낭여행도 가고 싶었고 국토대장정도 해보고 싶었다. 또 농활도 가보려 마음먹었다. 사실 당시엔 농활의 의미 같은 건 잘 알지 못했다.
이제 대학생이 되자 해외여행은 비용상의 문제 때문에 아직도 가보지 못한 상태다. 하지만 농활은 적어도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은가.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새내기 시절 첫 번째 농활에 참여했다. 당시에는 모르는 것도 많고 육체적으로 힘들기도 했지만 즐거웠다.
선배들과 동기들과 9박 10일이라는 시간을 함께하면서 가까워졌고, 대학에 가서 하고 싶었던 일을 해냈다는 것에 대한 만족감이 컸다. 무엇보다 의미 있는 일은 그곳에 살고 있는 친구도 사귀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도 농활 기간에 겹쳐 있던 생일 탓에 마을 분들과 함께 간 농활대원들에게 분에 넘치는 축하를 받았던 기억도 난다.
2년차가 되었을 때는 농활에 갈 것인가를 두고 많은 고민을 했다. 친구들이 당연히 참가할 것이라 기대하는 바람에 가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활의 육체적 고단함도 알게 되었고, '한번 해봤으면 됐지' 하는 생각을 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2년차가 되어서 경험한 농활이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다.
진짜 농활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고 할까. 육체적 고단함을 잊을 정도의 즐거움, 그리고 가슴 가득 찬 뿌듯함은 가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을 것이다.
3년차가 되어 얼마 전 다녀온 올여름 농활은 아쉽기만 하다. 3년 동안 알고 지낸 정을 올해로 마무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송으로 가는 마지막 농활에 더욱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물론 예전 농활과 마찬가지로 나에겐 매우 즐거운 날들이었지만 지나고 나니 아쉬움만 가득하다.
3년 동안 농활을 진행하며 많이 웃고 울고 정을 나누며 농활의 진정한 의미를 몸소 체험했다. 특히 3년 동안의 나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청송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아울러 청송과 같이 다음해에는 또 다른 곳에서 농활을 수행하며 또 다른 마음을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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