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팍스 달러디움' 이젠 정말 끝인가…달러의 위기

미국이 전 세계를 상대로 판매하는 가장 경쟁력 있는 상품은 무엇일까? 자동차나 영화를 떠올리겠지만 정답은 '달러'(dollar)다. 달러는 세계의 기축통화다. 국가 간 거래의 기본 결제화폐라는 뜻. 세계 3대 석유시장의 결제가 달러로 이뤄지고, 미국은 달러를 찍어내서 외국에 빌려주는 것만으로 연간 100억달러(약 10조원) 이상 이득을 얻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도 무제한의 마이너스 통장을 갖고 있는 셈이다.

이런 달러의 가치가 최근 수년간 쉼없이 추락하고 있다. 달러화 가치 변동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달러 가치의 등락에 따라 내 집값이 오르내리기도 한다. 미국 내 경기침체로 서브프라임 금융위기가 촉발되자, 미국은 경기부양을 위해 달러를 풀고 기준 금리도 낮췄다. 이로 인해 달러 가치가 떨어지자 세계의 큰손들은 새 투자처를 찾아 원유와 곡물 등에 한꺼번에 몰렸고, 결국 원유와 곡물 가격 급등을 불렀다. 원자재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나라는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고, 물가 인상과 경기침체가 일어나면서 집값마저 주저앉게 만들었다. 위축된 소비자들은 지갑을 닫고 경기침체가 더 심해지는 악순환이 빚어진다. 이렇듯 달러 가치의 변동과 우리 일상은 결코 무관치 않다. 지난 반세기, 달러를 기반으로 유지된 세계 경제질서 즉 '팍스 달러리움(Pax Dollarium)'은 과연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달러와 경상수지 적자, 그리고 금리

어려운 경제용어는 제쳐 두고 쉽게 이야기해 보자. 2000년대 들어 미국의 적자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졌다. 경상 적자만 지난 2006년 기준 8천700억달러에 이르렀다. 게다가 정부 역시 열심히 달러를 퍼날라서(전쟁 비용이 컸다) 재정 적자도 4천억달러를 넘어섰다. 미국 '나라 살림 가계부'를 정리했더니 얼추 계산해도 '마이너스 1조3천억달러'. 우리 돈으로 무려 1천300조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같은 기간 대한민국의 국내총생산은 880조원. 결국 미국은 일년 만에 나라 하나를 거덜냈다는 뜻.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지난 2004년 기준, 미국이 외국에 진 순수 빚은 2조5천억달러다. 이 정도 빚에 허덕이면서 매년 적자도 커진다면 국제통화기금(IMF)을 몇번이나 거덜내고도 모자랐을 법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미국은 여전히 세계의 최대 소비국으로 꿋꿋이 버티고 있다.

하지만 미국이 어떤 나라인가? 전 세계 어떤 나라도 생산할 수 없는, 그리고 반드시 사야만 하는 독점 생산제품을 갖고 있다. 바로 '달러'다. 모자라면 찍어내면 되고, 하루 평균 20억달러가 미국으로 되돌아온다. 2006년 미국에 유입된 국제자본은 8천800억달러에 이른다. 외국인들이 그만큼의 미국 자산을 사들였다는 뜻. 특히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들이 엄청난 액수의 미국 국채를 사줬다. '국채'라는 이름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결국 '빚 잔치'다. 어쨌든 매년 각국 중앙은행들은 미국 국채를 사며 엄청난 달러를 다시 미국에 들여보내줬고, 이렇게 들어온 돈은 미국 내 소비 붐을 일으켰다. 빚 잔치는 미국이란 거대한 경제가 매년 3% 이상 성장하게 만든 밑바탕이 됐다. 문제는 달러가 너무 넘쳐난다는 것. 가치가 떨어지다 보니 미국의 최대 수출품 '달러'는 직격탄을 맞았다. 외국 자본 유입이 줄면 미국 경제는 더욱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와중에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금리를 지속적으로 낮춰왔다. FRB는 미국의 중앙은행 역할을 하지만 정부기관은 아니다. 아무튼 벤 버냉키 연준리 의장은 지난해 9월부터 6개월간 6차례나 연방기준금리를 5.25%에서 2.25%로 3%포인트나 줄기차게 내렸다. 실물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다. 달러 가치가 떨어지면 미국 내 생산제품의 원가도 떨어지고 수출 경쟁력이 생긴다. 실제로 달러 약세 이후 미국의 무역 적자는 감소세로 돌아섰다. 미국이 달러 약세를 방치한다는 것은 금융계의 공공연한 비밀로 알려져 있다.

◆달러의 몰락 또는 부흥

미국 내 금융 위기→이를 해결하기 위한 FRB의 계속적인 금리 인하→이어지는 미국의 무역적자. 달러의 위기는 악순환 속에서 좀처럼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결국 달러를 팔아치우려는 분위기가 갈수록 고조되고 있다. 우선 각국 외환 보유고에서도 달러 비중이 줄고 있다. IMF에 따르면 지난 2002년 전 세계 외환보유고의 72%에 달했던 달러 비중은 2007년 말 64%로 줄었고, 올 1분기 말에는 62.99%까지 떨어졌다. IMF에 보고된 각국 외환보유고 총액 4조3천223억달러 가운데 달러화 표시 외화는 2조7천230억달러에 그쳤다. 빈 자리는 유럽의 유로화, 일본 엔화, 중국 위안화 등이 채우고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셉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외환 보유고에서 달러를 제외시키려는 움직임이 지속되면서 달러 가치의 하락을 더욱 부추길 것"이라고 전망했다. '달러는 곧 가치가 없어질 것'이라는 급진적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달러 패권이 쉽게 몰락하지 않을 것이란 의견도 있다. 여전히 각국 외환 보유고의 절대량이 달러이고, 대부분 국가들이 미국이라는 거대 소비시장에 경제를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달러 약세는 세계 경제에 '공공의 적'이다. 당장 유로화가 강세를 보이고 있지만 유럽 국가들로서는 결코 반갑지 않다. 유로화가 오르다 보니 유럽 내 생산제품의 수출 단가가 오르고 무역적자도 커지고 있다. 중동 산유국들은 달러화 가치가 자꾸 떨어지다 보니 원유를 팔아봐야 오히려 소득이 줄었다면서 원유 증산에 소극적이다. 이는 다시 원유 가격 상승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미국이라는 거대 시장이 몰락하면 그 충격파는 전 세계적으로 상상을 초월한다. 때문에 달러의 추가 하락을 막기 위한 국제 사회의 노력이 불가피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결국 달러화 위기는 미국 내 경상수지 적자 때문인데 최근 미국 내 경기 회복 조짐이 보이는 것도 긍정적 예측의 배경이 되고 있다. 지난 2006년 2천500억달러에 이르던 재정적자도 지난해 1천600억달러 규모로 줄었다. 경기가 다소 회복돼 세금이 많이 걷혔다는 뜻이다.

◆달러 헤게모니, 유로화가 넘본다

달러 헤게모니가 유지된다고 해도 예전과 같지는 않을 듯하다. 우선 유로화가 급성장했다. 한때 '달러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세계인들은 '이제 유로가 있잖아'라고 생각한다. 경제 전문가들은 유로화가 달러를 대신할 만한 위상과 잠재력을 갖췄다고 분석한다. 2006년 기준 유로권 GDP는 11조7천억달러, 교역 규모는 3조8천억달러다. 당시 미국의 GDP는 13조2천억달러, 교역 규모는 3조달러. 유로와 미국의 경제 규모가 맞먹고, 각국 외환 보유고 중 유로화 비중은 26%대를 넘본다.

게다가 중동 국가들은 미국 눈치를 보며 공식적인 언급을 못하고 있지만 원유 거래대금을 달러 대신 유로화로 해 주기를 내심 바라고 있다. 물론 이라크는 이런 시도를 했다가 전쟁을 치렀고, 이란은 미국과 첨예하게 대립 중(6면 참조)이다.

특히 전 세계 외환 보유고 1위인 중국은 투자자산을 달러 외에 유로화 등으로 다양화하겠다며 공공연히 으름장을 놓고 있다. 중국이 가진 달러는 무려 1조8천88억달러다. 지난해 8월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중국이 외환 보유고를 정치적 무기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보도를 해 상당한 파문이 일었다. 당시 중국 외환 보유고 중 미국 국채만 4천억달러, 기타 채권까지 합치면 9천억달러로 추정됐다. 만약 중국이 달러를 팔아치우면 달러 가치의 대폭락은 불가피해지고, 미국 내 주택시장은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결국 미국 경제가 몰락할 수도 있다는 시나리오다. 물론 이런 시나리오가 현실화되기는 어렵다. 중국이 달러를 팔아치우는 순간 중국이 보유한 달러 가치가 급락해 결국 제살 깎아먹는 행위가 되기 때문. 하지만 막대한 외환 보유고가 미국 경제를 폭삭 주저앉게도 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는 실현 가능성을 떠나 섬뜩한 느낌마저 들게 하기에 충분하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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