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 나의 스승, 시대의 스승

삶의 지표 마련해 준 '큰 그림자'

1981년 여름. 한 청년이 자전거에 수박을 한 덩이 싣고 안동군 일직면 조탑리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엔 온 나라가 뒤숭숭하던 때다. 계엄군이 착검을 한 상태로 학교 정문을 막는 바람에 학교 출입도 통제됐고, 여름 방학도 일찍 시작됐다.

시골집에 내려 온 이 문학청년이 찾아간 곳이 동화작가 권정생이 집사로 있던 조탑교회였다. "내가 권 집사인데 누구이껴?" 삐쩍 마르고 머리카락이 몇 개 듬성듬성 난 마흔다섯의 권정생. 이날 이후 26년 동안 청년은 그의 '아들'이나 다름없는 정을 나누게 된다.

그 청년이 시인 김용락이다.

지난해 권정생 선생이 별세하자 그는 조사(弔辭)에서 그날의 만남을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처럼 내 문학의 지침을 돌려놓은 운명적인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이 책은 그에게 삶의 지표를 마련해준 스승, 더 나아가 우리가 귀감으로 삼을 만한 시대의 스승 9명과의 대담을 엮은 대담집이다.

조탑동 오두막 좁은 방에서 미국의 횡포에 죽어가는 이라크인들을 비롯해 길 가의 작은 생명들에게까지 한없는 사랑을 준 권정생, 봉화 상운리 산골에서 농부작가, 재야 사상가로 살다 간 전우익, 경북 청송에서 태어난 아동문학가 이오덕, 원칙적인 농사꾼이자 철학자였던 천규석, 통일의 전령사인 문학평론가 백낙청, 대구경북 문단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문학평론가 염무웅, 분단 시대의 사림파 평론가 임헌영, 브라질 출신의 민중교육자 파울로 프레일리에 비교되는 '은둔하는 한국의 프레일리' 김민남 경북대 교수, '녹색평론' 발행인인 신념의 생태사상가 김종철 등이다.

이들은 모두 꼿꼿하게 자신의 신념을 지킨 인물들이다. 무소유의 삶을 살며, 한국의 자연주의자로 또 생명주의자로, 공동체와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애정으로 살아간, 또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지은이는 "무엇보다 민주적이고 정직한 인간이고, 사회적 약자들에게 동정을 갖고 있는 분들이다"고 적고 있다.

한마디로 사회와 역사의 등불이었던 이들이다.

문학으로, 때로는 시사에, 때로는 사소한 신변잡담과 같은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지키고, 향해야 할 지표들을 엿볼 수 있다. 그들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던 시인은 그들의 대담을 특유의 부드럽고, 세밀한 묘사로 독자로 하여금 마치 함께 얘기를 나누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해준다. 355쪽. 1만3천원.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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