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은자의 눈

"직장이라는 조직과 달리 혼자서 그림을 그리다 보면 자기 통제가 어려울 텐데 어떠세요?" 이런 질문에 대답해야 될 때가 가끔 있다. "세상에 널려 있는 잠언과 격언 몇 토막만 구비하고 있어도 자기 통제의 기본은 되겠죠"라고 대답하기도 하지만 오늘은 한 겹 안으로 들어가 보자.

"화가도 사회 구성원인 이상 당연히 지위와 역할이 버거울 만큼 부여되어 있죠. 질문에 근접하는 답을 바란다면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한두 번 창의적인 발상과 이를 이미지화하는 일은 쉬울지 모르나 평생을 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령을 피우고 싶을 때마다 작업실의 벽들이 은자들의 눈빛처럼 저를 주시하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은자들이 누구냐 하면 화가가 작품 발표를 통해서 알게 된 사람들 중 오래 교류를 유지하는 분들입니다. 그들이 있는 한 화가가 아무리 자유분방한 이미지의 직업이라 해도 계율 같은 존재가 되지요."

물론 화가가 자기 노력에 분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간단하지 않다. 우선 작가라는 명성은 당대의 미술계로부터 끊임없는 도전과 응전 상태에 있고 이에 잠시라도 방심하면 뒤안길에서 흩어질 이름이 된다. 가족을 부양하고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책임감이라는 짐을 감수해야 하며, 관심을 보여주는 화랑으로부터 신뢰를 유지하려면 자기 개발과 치열한 작가 정신을 잃지 않아야 한다. 누구에겐들 호락호락한 세상이 있으랴.

채찍과 당근 역할이란 게 생존에 필요한 모든 관계의 양상이긴 하지만 그 중에서 컬렉터로 호명되는 미술품 수집가와 미술에 대한 각별한 이해와 교양을 지닌 애호가가 있다. 이들은 화가를 행복하게 만드는 영양제이자 각성제 역할을 하는 파수꾼이다. 이들은 대개 한 시대의 걸출한 인물이지만 의외로 은자에 가까운 면모가 있다. 사회적 성공을 거둔 위인들임에도 그들은 드러냄이 없는 당대의 숨은 후원자들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인류 문화의 유산으로 세계의 자산이 된 모든 걸작들의 배경에는 그런 은자들이 있다. 이들은 화가가 생활고와 방탕에 찌들지 않도록 자신들의 성공을 나누어 주기도 하고 미술 바깥의 새로운 지식과 경향을 연결해 주는 통로로서 기능을 기꺼이 수행한다. 은자들의 눈은 화가로 하여금 자신의 재능을 헛되이 탕진하지 않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도록 조용히 그리고 엄정하게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은자들에게 축복이 있길 바라며.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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