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종문의 펀펀야구] 생중계중 실수 이야기

1994년 4월 필자가 부산 사직구장에서 프로야구 라디오 중계 해설로 처음 마이크를 잡았던 날의 얘기다. 부산에서 열린 토요일 낮 경기였지만 하늘이 검게 변한 을씨년스러운 날씨라 무척 쌀쌀했다. 막상 중계방송 부스에 들어서니 걱정이 앞서고 첫 중계방송이라 이것 저것 잔뜩 준비는 했지만 한동안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시 경험 많은 캐스터가 이런저런 잡담으로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어 주면서 방송이 시작되면 필자에게는 경기 전망을, 홍승규 위원에게는 출전 선수 소개를 주문했다. 전광판을 보니 시작 시간이 10여분 남아 있었고 초조한 마음에 아예 첫 말을 요약해 달달 외워 버렸다. 몇 번을 되풀이해 외우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드디어 경기 시작과 함께 캐스터가 경기를 소개하며 생방송으로 중계가 시작됐다. 필자는 경기 전망을 묻기만 하면 곧바로 대답할 수 있게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되새기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멀리 중견수 쪽에서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일면서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아, 바람이 심하게 부네요. 그럼 오늘 같은 날씨에는 어떻게 대비해야 하나요?" 캐스터가 필자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물었다.

그 순간 갑자기 세상이 하얗게 밀려왔다. 잔뜩 긴장하면서 준비한 대답을 하려는 찰라에 던져진 돌발 질문에 말문은 꽉 막혀 버렸다. 10여초 흘렀을까? 대답을 기다리던 캐스터는 급히 방향을 바꿔 다시 진행해 나갔고 필자는 과전압으로 회로가 타버린 가전제품처럼 넋을 잃고 있었다.

한순간 가족과 친구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창피한 생각도 들었다. 야구 해설을 하게 된 게 후회스러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3회초 삼성 공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마음이 진정되자 가슴 속에서 묘한 오기가 일었다. "이왕 이렇게 된거 후회없이 해보고 관두자. 지금 그냥 나갈 수도 없잖아."

이후 3회부터는 묻지도 않는데 먼저 해설을 해버렸고 노련한 캐스터가 말을 이어주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떠벌리며 끝냈다. 생방송의 무서움을 절감한 그날 필자에게 야구를 가르쳐준 정동진(당시 태평양 돌핀스 감독)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말하고 물었다. "야구 해설이란 대체 무엇입니까?"

"경기의 흐름에서 맥을 짚어주는 것이지. 시시각각 전략과 용병의 선택을 하는 역할은 감독의 몫, 그 선택에 따라 주어진 목표에 도전하며 성취하는 역할은 플레이어의 몫이야. 수많은 선택의 방향을 제시하고 그중에서 감독이 택한 선택의 타당성과 결과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 해설자의 몫이지. 미리 예측하거나 결과를 성토하는 것은 팬들의 몫이고…. 해설자는 감독도, 선수도, 팬도 아닌 객관자인 것이야."

방송을 그만두려 했던 필자에게 이 말은 야구 해설에 대해 다시금 깊이 생각해 보게 계기가 됐다. 누구나 돌이켜보면 기억하기 싫은 실수가 있다. 하지만 그러한 뼈아픈 경험을 통해 인간은 거듭나는 것이다.

최종문 대구방송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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