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팔공산에 둥지 튼 배우 유퉁

내 몸은 새, 내 마음은 바람…그저 흘러갈 뿐

배우 유퉁(52)이 팔공산 자락에 자리잡은지 벌써 3년째다. 그는 국밥집을 한다. 그림도 그린다. 조각도 하고, 토우(土偶) 도 빚고 책도 쓴다. 작곡도 하고, 연기도 한다. 그를 만나기 전, 이것저것 관련 자료들을 살펴봤다. 국밥집 성공 스토리와 6번의 이혼, 사기 피해, 나이 어린 아내와 국제결혼, 몽골과 인연 얘기가 대부분이다. 그 중에는 몽골 조폭 논란도 있다.

지난달 26일 오후, 팔공산 바람은 벌써 시렸다. 순환도로를 타고 파계사 삼거리에서 칠곡 동명으로 꺾어 내려가자 '유퉁이 사는 집'이 눈에 들어온다. 식당 입구에는 토우를 돌로 만든 94점의 조각물이 줄지어 섰다. 남근과 비슷한 형상에 제각각 표정들, 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건 장승 138점. 그의 말대로 '바람 속에 남긴 퉁이의 흔적들'이다. 식당 안 곳곳에 자리잡은 수천개의 토우들은 크기와 표정이 제각각 달랐다. 식당 벽면은 손바닥만한 딱지그림과 글귀가 가득 메우고 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들,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소회, 삶에 대한 단상들이었다. 미리 읽어봤다면 인터뷰가 훨씬 수월했을 듯싶었다.

◆대구는 느낌이 좋더라꼬

식당 안에는 아내 바상 자르갈(23)씨가 다림질을 하고 있었다. 남편은 자고 있다고 했다. 책 출판 관계로 부산에서 새벽에야 돌아왔다고 했다. 15분여가 지나자 피곤한 표정으로 그가 천천히 계단에서 내려왔다. "제 쉼터가 있는데 올라가입시더." 건물 옥상에는 몽골가옥인 겔 3채가 사이좋게 자리잡고 있다. 그 옆 작은 '쉼터'는 세 벽면이 통 유리로 돼 있어 마치 액자 속에 풍경을 담은 듯했다. 트인 문을 타고 '강'이 되어 흐르는 초가을 바람에 발가락이 옴찔거렸다. 그는 "바람이 불면 깃발이 펄럭이는 소리가 말발굽 소리처럼 들린다"고 했다. 그에게 무슨 책을 쓰고 있냐고 물었다. "요즘 '유퉁의 원맨쇼'라는 책을 쓰고 있어요. 제가 연기를 떠난 지 15년쯤 되거든요. 사람들은 그 뒤로 제가 국밥집만 한 줄 알지만 그게 아니거든. 돌조각, 그림, 장승조각, 토우, 골동품 수집 등등. 연기를 그만두고 지금까지 뭐했냐에 대한 제 답이죠."

1990년대 말까지 그는 꽤 잘나가는 연기파 배우였다. 걸쭉한 사투리와 코믹 연기, 험상궂은 인상이 그의 대표적인 이미지였다. "답답하더라꼬. 제가 연극배우 출신이에요. 무대에서 라이브로 활동하던 배우가 카메라 앞의 편집 배우가 되니까 남는 게 없더라꼬. 또 방송국에서 온 전화가 아니면 친구들 전화받고도 실망하는 내 모습에 이건 아니다 싶었고."

대중 곁을 떠난 그가 국밥집을 처음 시작한 건 1997년 IMF사태 직전이었다. 지인의 식당일을 도와주며 경기도 양평에 1호점을 냈고, 2호점은 아예 자신이 차렸다. 경남 의령에서 국밥집을 하던 외할머니의 비법을 어머니가 전수받았고, 그가 다시 물려받았다고 했다. 유퉁의 국밥은 전국에 체인점이 30여곳이나 된다. "돈 많이 버셨나요?" 그가 손을 가로저었다. "제가 직영하는 곳 외에는 다 업주들이 버는 거고 저는 아무 상관 안 합니다." 부산 토박이인 그에게 대구는 제2의 고향이다. "대구가 느낌이 너무 좋더라꼬. 같은 경상도 말씨라도 부산말은 상스럽게 느껴지는데 대구 사투리는 억수로 느낌이 좋더라고요."

딸 다예(4)가 다가오자 굳어있던 그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그와 아내, 딸 다예 모두 머리가 노란색이다. "제가 노란색을 좋아합니다. 젊어보이잖아요. 그림에도 노란색을 잘 씁니다." 가장 많이 받았던 인터뷰 질문이 뭐냐고 물었다. "언제 이렇게 많은 작품을 했느냐는 질문을 제일 많이 받죠. 남들 자는 시간, 노는 시간에 계속 스케치하고 그립니다. 그림 가격은 안 팔아봐서 모르고. 지금까지 그린 그림은 9천999점은 될 겁니다."

◆다예야 사랑해

그는 여행을 좋아한다. 지금까지 30여개국은 다녀봤다고 했다. 그가 최고로 꼽는 여행지는 뉴질랜드. 갖다대면 그림이 나온단다. "여유로운 인간상이 바람과 춤추는 곳, 호수마다 바다마다 주말이면 돛단배들이 물살을 가른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는 천국보다 아름다운 그곳에서 뼈아픈 배신을 당했다. 로트루아 인근에 갤러리를 짓겠다고 투자한 17만 뉴질랜드달러(약 1억5천만원)를 고스란히 동포에게 사기당했다. 그가 받은 충격은 컸다. 자고 일어나니 입이 돌아갔고, 체중이 16kg이나 빠졌다. 지병인 당뇨도 악화됐다. 2002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충격도 가시지 않던 터였다. "뭘 해도 안 되더라고요. 일이 꼬이기 시작하는데 하는 것마다 다 박살이 나더구먼."

좌절했던 그를 일으킨 건 몽골이었다. 1996년 KBS '도전! 지구탐험대' 촬영 차 찾았던 몽골 카초르트 마을의 양부모를 8년 만에 다시 찾았다. 촬영이 끝난 뒤 그는 몽골에 남았다. 몽골의 킥복싱 지원과 보육원 및 양로원 봉사활동, 그리고 몽골한인회와 함께 '유퉁의 낙서전'도 열었다. "그 후로는 한국이 싫더라고. 그래서 다시 몽골로 갔어요. 그러다 통역 겸 가이드, 가사도우미를 해줄 사람을 찾다가 다예 엄마를 만났지." 대학생이라지만 29살이나 어린 처녀가 처음부터 여자로 보일 리 만무했다. 그저 참하고 알뜰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그렇게 좋아하데.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났을 때 저녁에 술이라도 한 잔 하자고 자르갈에게 통역을 시켰는데 다 이상하게 얘기를 전하더라고. 사실대로 얘기해줘라." 그가 조용히 앉아있던 아내를 채근했다. "맞죠. 뭐. 그냥 좀 싸가지 없이 얘기했어요. '시간있냐. 보니 좀 바쁜것 같네.' 그런 식으로."

몽골에서 반대는 없었을까. 그의 아내가 무심한듯 대답했다. "반대는 안 했어요. 외국인과 너무 일찍 결혼한다고 놀라긴 했지만. 잘 결혼하느냐가 문제지." 마침 장남인 유호걸(32)씨가 들어왔다. 그의 아내는 장남 호걸씨보다 9살, 차남 호진씨보다 7살이 어리다. 두 아들 모두 첫번째 부인 사이에서 난 자식들이다. 지금 아내와 결혼하기 전에 그는 6번의 이혼을 경험했다. 첫번째 부인과는 재결합과 이혼을 3번이나 반복했다. 어린 새어머니를 받아들였던 심정이 궁금했다. "어차피 제 어머니가 있는 것이고, 아버지가 사랑하는 분이니까요." 존칭 문제도 '호걸씨'와 '다예 어머니'로 정리가 됐다. 거듭된 이혼에 대해 유퉁은 "안 맞으니까"라고 정리했다. "나는 아티스트예요. 창작을 하는 사람을 간섭하려고 하면 안 돼. 나는 소가 아닙니다. 나를 끌고 가려 하지 마라. 나는 새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 나는 바람입니다. 아주 미세한 구멍만 있어도 빠져나가는 바람."

아내의 배가 불러오자, 그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손 안에는 2천만원이 전부였다.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자리를 튼 곳이 지금의 팔공산 본점이다. "2년 동안 문닫았던 가게 자리였는데 터가 세다고 해서 장승 180개를 깎고 시작했어요.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맞더라고요. 포기하면 그냥 인생 끝나는 거고. 나는 포기할 수 없지. 그래서 매일 가게 앞에 나가서 깃발을 흔들며 손을 흔들었다고. 현수막 수십장도 내가 직접 붙였고요." 그렇게 태어난 딸 다예는 그의 최고의 보물이다. "다예가 그림도 잘 그리고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하고." 다예가 볼에 손가락을 대며 예쁜 짓을 했다. "아이고 이쁘네. 멋있네~."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이다.

◆난 내 갈 길 간다

-다양한 표정의 토우, 남근 모양의 조각을 만든 특별한 이유라도?

"그리는 것이 즐거워서 그립니다. 그리고 나서 보는 것이 즐거워서 그립니다. 내 삶의 흔적이고. 토우나 조각들의 그 표정이 바로 제 표정입니다. 날마다 다른 우리 표정처럼 토우를 돌조각으로 365개 만드는게 목표입니다. 남근은 뿌리입니다. 내 조상이고, 자손입니다. 기쁨이기도 하고요."

-자신이 보는 나, 남이 보는 나가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세요?

"유퉁은 술 잘 먹고 싸움 잘하고, 도박 잘하고 아무 여자만 보면 집적댄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아니지. 술도 좋아하지 않고, 도박은 전혀 모릅니다. 그냥 그림 그리고 노래 좋아하고. 또 저는 늘 뭔가 일을 해야되는 사람입니다. 그냥은 못 쉬어요."

-지난 2005년에는 몽골 진출한 조폭 보스라는 얘기도 들으셨잖아요?

"조폭이라면 조직적으로 이권에 개입해 폭력을 행사하는 건데 제가 공인인데 어떻게 조폭입니까. 몽골에 가면 남자 기질 있는 동생들이 여러 명 양복입고 나와서 인사하고 그러니까 오해를 받은 거죠. 말이 말을 만드는거지."

-연기를 하고 싶진 않으세요?

"할 겁니다. 아내와 다예에게 연기자의 모습도 보여주고 싶고. 경상도 배우 말고 제가 다른 지역 사투리도 잘 쓰거든요. 어떤 배역이든 역할에 관계없이 초심으로 돌아가 매달릴 겁니다. 조만간 좋은 소식도 있을 거예요."

-타임머신이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으세요?

"나는 아버지가 살아계셨던 때로 돌아가서 의사가 돼 아버지를 살리고 싶어요. 내가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없으니까. 어머니는 38살에 혼자 되셨는데 항상 박수, 칭찬, 하면 된다 이 3가지를 가르치셨어요. 내 본명이 유순이거든. 우리 순이는 사하라 사막에 가도 살아올 애다. 그런 자신감을 주셨죠."

-10년 뒤 유퉁은 어떤 모습일까요?

"아마 제 두 아들의 매니저가 됐을 것 같아. 지금은 두 아들이 연기의 세계보다는 사업으로 기반을 잡는 중인데요. 내가 연기를 다시 시작하면 자식들의 시선도 그리로 쏠리겠죠. 또 폐교를 찾아서 제가 지금까지 만든 작품과 돌조각을 전시하는 문화 공간을 만들 겁니다. 생각이 사람을 살리고 죽입니다. 행복은 내 가슴 속에 갖고 있거든. 내가 꺼내야지 남이 꺼내줄 수 없어요."

돌아오는 길, 그가 건네준 작곡 CD를 차 오디오에 꽂았다. 그가 한 말이 머릿속에 맴돈다. "춤추며 노래하는 가수가 되고 싶어요. 사람들이 막 신나게 따라할 수 있는 그런 가수. 요즘 가수들은 신나게 부르질 않더라고." 이 퉁퉁한 경상도 사내의 삶은 왜 이리도 굴곡지고 복잡다단했던 것일까. 돌아오는 길에야 깨달았다. 그에 있어 가치 판단의 기준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 누가 뭐래도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그저 갔던 것뿐이라고.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유퉁은?

1957년 부산 출생. 극단 '어릿광대' 대표를 지냈다. 1987년 '노인 새 되어 날다'로 그해 부산연극제와 제5회 전국연극제에서 각각 연기상을 받았고 영화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이후 드라마 '까치 며느리', '적색지대', '한지붕 세가족' 등에서 컬컬한 사투리와 코믹연기로 사랑받았다. 자필 문답집 '미친 놈의 헷소리', 낙서집 'oh, my god', 소설 '국밥달인 천하평정' 등을 펴냈고, 그림과 토우 개인전도 열었다. 1997년 '유퉁의 국밥집'을 창업했고, 2005년 몽골 출신의 아내 바상 자르갈과 결혼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