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도는 지금 혁명 중이다. 자연의 시대에서 인공의 시대로, 전설의 시대에서 역사의 시대로 전환하고 있다. 서도 유일의 소통 길, '물골 가는 길'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서도의 어업인숙소 자리는 동남향 양지녘이다. 앞에 작은 바위섬들이 있어 일찍부터 뱃사람들이 며칠씩 내려 야영하던 곳이다. 그러나 독도에서 유일하게 식수가 나는 물골은 북풍받이로 종일 햇볕이 들지 않고 눅눅하다.
북에서 몰아치는 거센 물결을 맞받아 배를 대기에도 적당하지 않다. 그래서 서도에 몸을 부린 뱃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섬의 동남쪽에 살면서 반대쪽 물골에서 물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물통을 지고 수직 절벽에 붙어서 기어 넘었다. 목숨을 담보로 한 생명수 구하기였다.
1965년 고 최종덕씨가 서도에 집을 짓고부터는 사정이 더 심각해졌다. 섬에 머무는 사람이 늘어나고 더 많은 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해녀와 뱃사람이 많을 때는 15명씩 찾아들었다. 하루 한통씩 길어오는 물로는 어림없었다. 길이 필요했다.
울릉군에서 건설업자를 들여 물골 길 공사를 발주했다. 절벽에 계단을 달아나가는 끝없는 난공사에 업주는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다시 최종덕씨는 김성도 현 독도이장을 비롯한 5명의 인부들과 힘을 합해 계단 닦기에 나섰다. 모래자갈 시멘트를 지고 올라가 하루에 네댓 계단을 만들었다.
인건비는 고사하고 자재도 겨우 끌어댔다. 때문에 계단이 나란하지 않고 제멋대로이다. 어떤 것은 넓고 어떤 것은 발을 바로 놓을 수 없을 만큼 좁다. 어떤 것은 높이가 20㎝쯤 되는데 어떤 것은 50㎝나 된다. 중간중간 너무 높아 반만 만든 보조계단도 있다. 이렇게 10개월여에 걸친 대역사(大役事)를 마무리하고 가드밧줄을 맸다.
그 길은 30여년간 독도 사람들의 '고난의 길'이자 '생명의 길'이었다. 그러나 2년여 전부터 그 길은 본래 기능이 퇴색되었다. 독도 뱃길이 열리면서 식수를 실어 나르기 시작했고, 지난해부터는 바닷물 담수화시설이 설치되면서, 물골 가는 길은 퇴락하게 된 것이다.
오랜 비바람에 시달린 시멘트 기둥들은 퍼석퍼석해져 조금만 힘을 주면 무너져 내린다. 시멘트가 육탈(肉脫)해버린 난간 기둥 철골은 새까맣게 녹이 슬고 삭아내려 젓가락 같은 뼈대만 남았다. 이 때문에 물골 가는 길은 더 험난하다.
한발 한발 발끝만 보고 오르지만 끝끝내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면 곧장 바다로 빨려들어갈 듯 오금이 저리다. 헐떡이는 숨은 목까지 차오르는데 아직 3분의 1도 못 올랐다.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10분여를 더 올라가면 6.6㎡(두평) 남짓한 평지가 나온다.
이마의 땀을 훔치고 숨을 돌리고 나면 동도가 손에 잡힐 듯 건너다보인다. 황토 같은 넓적바위에 서면 서쪽에서 뭍의 바람이 불어온다. 자연 눈길은 뭍에서 흙냄새를 담고 달려온 배라도 있는지 울릉도를 더듬는다.
그곳에서부터 절벽을 따라 비스듬히 기슭을 돌아 올라가면 물골 넘는 고개 정상이 나온다. 고갯길까지 가는 길도 곳곳에 토사가 흘러내리고 돌피나 명아주 따위의 풀들로 덮여있다. 내려다보이는 물개바위를 넘나드는 파도는 언제 봐도 시원하다. 바위틈에는 해국과 술패랭이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고개를 돌리면 탕건봉의 절묘한 아름다움이 가득히 들어온다.
내리막길도 위태롭다. 계단은 이미 무너진 지 오래고 토사가 흘러내려 길을 덮고 있다. 물골로 한발 한발 접근해가는 동안 계단은 10~20m씩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이제 서도 어업인숙소에서 물골 가는 길을 장님 밤길 가듯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지금 물골 가는 길 정비작업이 본궤도에 올랐다. 물골 입구에서 철제 계단을 놓기 시작해 늦어도 두 달 이내에는 깔끔한 나무계단으로 단장될 것이다. 모래자갈을 지고 올라가 놓았던 시멘트 계단들은 나무계단 아래로 묻힌다. 생명수를 지고 나르던 전설은 2008년으로 막을 내렸다고 역사는 기록할 것이다. 그래서 서도는 지금 혁명 중이다.
독도에서 전충진기자 cjje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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