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창문마다 역삼각형 꼴로 붙어있는 빨간 딱지는 뭔가요?"
"일본은 5층 이상 건물에는 무조건 소방 진입 창문을 정해둡니다. 불이 나거나 큰 재난이 일어나면 그 창문을 깨고 소방대원이나 진압대원들이 들어가는 거죠. 그래서 빨간 딱지가 붙은 곳에는 어떤 물건도 놔서는 안 됩니다."
지난달 2일 일본 도쿄 중심가에서 기자가 일본 재난 관계자들과 나눈 얘기였다. "재난에 대비한 기본 원칙을 지킨다"는 단순하지만 심오한 태도에 기자는 문득 2005년의 마지막 날 일어난 서문시장 대화재를 떠올렸다. 1천억원 상당의 재산피해를 가져온 서문시장 대화재는 상인들은 물론이고 사고 도시의 오명을 쓰고 있는 대구시민들에게 큰 아픔으로 남았다. 더구나 큰불이 아니었기에 불이 났을 당시 모두들 "금방 불길이 잡힐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작은 불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도쿄 한복판에서 서문시장 상인들의 절규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재난 대비는 '기본에 충실'한 것부터
'인재로 일어난 사고' '인재가 화를 더 키웠다'는 꼬릿말을 떼지 못하는 '한국형 재난'과 달리 일본은 기본에 충실했다. 일정 높이 이상의 건물마다 비상출입 창문을 마련하는 것은 물론이고 수해에 대비한 공무원들의 태도도 판이했다.
지난달 3일 일본 전역에는 가느다란 빗줄기가 내렸다. 우산을 쓰거나 말거나 크게 상관이 없을 정도였지만 일본 기상청은 중서부 지역 일대에 호우주의보를 발령했다. 말 그대로 '비가 더 올 가능성이 있으니 주의하라'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곳 공무원들은 곧바로 비상 근무에 들어갔다. 오후 6시를 훨씬 넘긴 시간에도 퇴근하지 않는 모습에 "비효율적인 게 아니냐?"고 물었더니 "매뉴얼대로 기본에 충실할 뿐"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날 내린 비는 10㎜가 채 되지 않았다.
다음날 다시 만난 그에게 "비가 별로 안 올 것 같던데 실제로 그랬다. 억울하지 않으냐"고 또다시 물으니 답이 가관이다. 그는 "전쟁이 날 때 피해 규모를 예측할 수 있느냐"며 "정해진 대로 해놓아도 피해가 나면 속수무책인 것이 재난"이라고 잘라 말했다.
■단순 재난은 없다
일본 공무원의 말대로 오늘날의 재난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처방식 역시 과거와 같은 복구 중심이나 단편적인 방식으로는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불이 나면 불만 끄면 되는 것이 아니라 전기가 나가고 물이 끊긴다. 물이 끊기면 씻지 못하게 되고 이로 인해 전염병이 창궐하게 되는 등 하나의 재난으로 사회 전체가 마비될 수도 있다. 특히 다중이용시설, 사회기반 시설 등 재난 취약시설이 급증하고 있는 것도 피해 대규모화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재난을 통제하는 법체계가 여러 개로 나뉘어 있어 비효율적이다. 재난 대비 방식을 통합해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시급하다. 이재은 희망제작소 재난관리연구소장은 "국가재난관리 정책, 정책심의기구, 재난대책기구 등 유형별로 다원화되어 있는 재난 및 안전관리 정책·기구·조직의 통합과 일원화를 시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존 법 체계에서는 ▷사회적 재난(민방위관리기본법, 비상대비자원관리법 등) ▷인적 재난(재난관리법, 대기환경보전법, 산업안전보건법, 선박안전법, 소방법 등) ▷자연적 재난(자연재해대책법, 농어업재해대책법, 전염병예방법) 등으로 나뉘어져 여러 관리부서가 맡고 있는 형국이다.
■대두되는 시민단체 역할론
일본 취재 당시 주민들은 한결같이 '지역 커뮤니티'를 강조했다. "우리 동네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우리이고 행정은 뒷받침을 해주는 기관일 뿐"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일본은 시민들의 참여도를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으로 방재의 기본 목표로 잡고 있다.
지금까지 정치투쟁만 능사로 여겨왔던 한국의 시민단체도 이 같은 일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의미에서 지난해 초 민간 최초로 탄생한 희망제작소(상임이사 박원순) 재난관리연구소가 상당히 돋보인다. 일본 사례를 벤치마킹해 시민사회단체 영역에서 본격적인 재난 연구에 나섰기 때문이다. 더 이상 재난을 정부와 학계에만 맡겨놓을 수 없다는 의미다.
희망제작소 관계자들은 "일본의 경우 재난 관련 예산의 70%가 재난 예방비로 쓰이지만 우리나라는 70%를 복구비로 쓰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물, 지리, 심리, 의학, 건축, 기상' 등 유관 분야를 유기적으로 결합해 해결책을 만들어가겠다"고 했다.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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