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장고'.
1998년 재정경제원 차관 재직시절 외환위기를 불러온 책임자로 불명예 퇴진했던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함께 옛 친정인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돌아오면서 과천 관가에는 이 같은 말이 나돌았다.
묘한 것은 그가 쫓겨날 때도 우리나라가 경제위기를 맞고 있었고 그가 돌아온 지금에도 경제위기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관가에서는 강 장관에게는 뭐가 씌었다는 말부터 1998년의 치욕을 씻을 절호의 기회를 하늘이 주고 있다는 말까지 입방아 소리가 다양하다.
현재 그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우선 언론으로부터는 호되게 당했다. 연초 고환율 정책 때문이다. 당시 이를 두고 서민들 주머니를 털어서 삼성전자를 도와주는 꼴이라는 비판이 제기될 만큼 그의 고환율정책은 엄청난 비판에 직면했다.
이어진 미국발 금융위기와 그에 따른 국내 경제후퇴에 대한 처방전 제시와 관련해서도 그는 언론으로부터 위기대응능력을 의심받고 있다.
그를 잘 알거나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경제가 대외적인 요인에 휘둘리고 있는 상황에서는 누가 그 자리에 가도 어쩔 수 없다" "강 장관처럼 요직을 두루 거치며 능력을 쌓은 재무관료도 드물다"는 논리로 그를 옹호하고 있다.
하지만 비판론은 혹독하다. 우리 경제가 대외요인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현 상황에서 어떤 이가 경제사령탑에 앉아도 별수 없다는 논리는 결국 기획재정부 장관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냐는 비판이다.
그는 이러한 비판을 강하게 되받아치고 있다. 본인을 비롯해 경제팀이 시장의 신뢰를 상실하는 바람에 경제위기를 고조시켰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최근 금융위기는 신뢰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라고 강조했다. 정부 신뢰성 자체를 자꾸 거론하는 게 오히려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우려까지 덧붙일 정도다.
환율정책 실패로 물가가 급등, 위기상황으로 치달은 데 대해 책임지라고 하자 "책임을 질 만한 시간이 없었다"고 맞선 뒤, 오히려 정치권이 싸움하는 바람에 관련 법이 늦게 시행돼 정책 효과를 제대로 얻지 못하고 있다고 역공을 폈다.
종합부동산세 문제에 대해서도 "미실현 소득에 대해 과세하면 몰수와 같은 결과를 낳는다"며 폐지돼야 한다는 소신을 폈다. 서울 강남에 고가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는 그는 관가를 떠나 야인으로 생활할 때 소득도 없이 종합부동산세만 냈다며 억울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한 소신과 고집이 느껴지는데, 이 같은 측면이 그에 대한 비난을 더욱 키운 측면도 없지 않다. 그의 이 같은 되받아치기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도 한몫하고 있다.
이 같은 소신은 그가 잘나가는 경제관료가 될 수 있었던 밑바탕이기도 했다는 것이 주변의 평가이다. 1977년 부가가치세 신설 문제를 떠안은 주무과장이었을 때는 전국적으로 들끓었던 반발 여론에도 불구하고 결국 관철시켰으며 '가장 보람됐던 일'이라고 술회했다. 그 후 재무부의 국제금융국장·세제실장·이재국장 등 금융과 조세 분야 요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하는 등 승진에서 동기들보다 늘 앞서갔다고 한다. 그러나 너무 강한 성격 탓에 이재국장 때는 장관의 지시를 거부, 인사상 불이익도 맛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환율정책 문제만 해도 '경상수지를 경제정책에서 최우선해야 한다'는 소신이 워낙 강한 바람에 빚어졌다는 지적이 적잖다. IMF 외환위기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재정경제원 차관자리에서 쫓겨났던 장본인이고 보면 '들어오는 달러보다 나가는 달러가 더 많은' 경상수지 적자상황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몸서리칠 만도 하다. 게다가 재경원 차관을 끝으로 10년간 야인 생활을 하며 절치부심해왔을 그로서는 기획재정부 장관으로의 컴백을 통해 명예회복에 나서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이 대통령과의 인연은 1980년대 초반 소망교회에서부터 시작돼 30여년 지속돼 왔단다. 2005년 이명박 서울시장의 서울시정개발연구원장으로 기용된 것을 계기로 지난 대선 때는 선대위 정책조정실장 겸 일류국가비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며 공약을 총괄했고, 대통령직 인수위에서 경제 1분과 간사를 맡으며 '재정부 장관 0순위'로 꼽혔다. 747(7% 성장·국민소득 4만달러·7대 강국)공약으로 압축되는 'MB노믹스' 입안의 주역이었던 그가 이제 경제 총사령관으로 나선 것이다.
그러나 야인으로 지냈던 10년간의 공백이 그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 기간은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엄청한 변화를 겪었던 격동기였다. 때문에 그가 당시의 패러다임에만 머물러 있는다면 MB노믹스는 결국 좌초할 것이란 우려도 제기된다. 그가 컴백하자 과천 관가에서 '올드 보이'라는 별칭이 들렸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듯하다.
강한 고집과 소신은 리더십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경제팀 수장으로 다른 경제부처를 포용하고 이끌어가야 하는데 한국은행이나 금융위원회 측과의 갈등에서 보여지듯 그러지를 못했다는 것. 정제되지 못한 표현들로 화를 자초하기 일쑤였다. 헌법재판소의 종합부동산세 위헌결정을 앞두고는 국회에서 헌재 사전접촉 발언을 함으로써 파문을 일으켰다.
10년 만에 친정으로 돌아온 강 장관이 10년 전 불명예 퇴진이라는 치욕을 씻고 '잘나갔던 경제관료'의 진면목을 보여줄지, 아니면 IMF 위기 당시 "능력 있는 줄 알았는데 위기가 터지니까 무능하기 짝이 없더라"는 재경부 공무원에 대한 지탄을 다시 받을지 그의 행보가 주목되고 있다.
서봉대·박상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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