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줄로 읽는 한권]하드 SF

어린시절 더블데크 카세트로 좋아하는 노래를 이것저것 녹음시켜 친구들과 선물로 주고받던 기억이 난다. 아티스트의 앨범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의바르게 경청해야 한다는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나는 이런 중학생판 누더기 '컨셉' 앨범이 너무 좋았다. 존 존의 연주곡 뒤에 갑자기 아이언 메이든이 튀어나와 버리는 의외성. 그것은 확실히 600원짜리 공테이프로 주고받을 수 있었던 우리 세대의 행복이었다.

책 중에서도 그런 류의 행복함을 주는 것들이 있다. 최근에는 박계수가 편역한 '독일 환상 문학선'이 그렇다. 물론 전문가가 '환상 문학'이란 기준을 가지고 엄선한 작품집인 만큼 이 단편들에는 나름대로 일관된 코드가 흐르지만, 역시 들여다보면 볼수록 작가의 각양각색의 개성들이 분명하게 빛난다. 고골, 포, 보들레르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E. T. A 호프만을 필두로, 프리드리히 푸케, 파울 셰어바르트, 한스 하인츠 에버스 등의 작가들은 각자의 기괴한 상상력과 필치로 한 권의 책을 곳곳마다 새롭게 채워준다.

'독일 환상 문학선'에 단편을 싣고 있는 작가들은 3명이 18세기에, 9명이 19세기에 출생했다. 소설이라는 장르의 역사가 생각 외로 그리 길지 않음을 고려하면, 이들-특히 호프만이나 푸케-의 단편들은 가히 판타지 문학의 효시라고 부를 만하다. 세계의 주인공이 나폴레옹에서 오바마로 바뀌는 동안, 판타지 문학도 프랑켄슈타인에서 해리 포터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진보와 변화를 거듭했다. 음악 장르에서 새롭게 '하드 밥'이나 '하드 록'이 등장했듯이 20세기 후반 판타지 문단에서는 '하드 SF'가 출현했다. 단편집 '하드 SF 르네상스'는 최첨단의 과학을 토대로 명징한 상상을 구축하는 현대판 '하드 SF'들을 소개한다. 이 바닥의 전문가 데이비드 G. 하트웰이 엄선한 작품만을 실었기에 역시 푸짐하고 신선하다.

'독일 환상 문학선'이 고딕풍의 스테인드글라스라면, '하드 SF 르네상스'는 그야말로 나노 공정의 반도체와 같다. 그래서 이 두 권의 단편집은 교차로 한 편씩 읽으면, 더욱 재미있다. 그로테스크한 '만다라화'와 신상품 '인간 페르몬'의 교차. 그것은 돈 만원으로 얻을 수 있는 우리 모두의 행복이 될 수 있다.

만다라화를 소유하는 사람은… 엄청나게 많은 돈을 얻을 수 있소. 그 대신 만다라화는 자신을 소유한 사람의 영혼을 그의 주인인 악마에게 맡길 것을 요구합니다. 소유자가 만다라화를 다른 사람의 손에 넘기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지요. '독일 환상 문학선'중 '만다라화 이야기'/E. T. A 호프만 외 지음/박계수 편역/황금가지/374쪽/9천500원

미래는 말일세. 최음제에 달려있네. 사람들이 길어진 인생에서 즐길 것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어. 사람들이 원하는 건 여자를 사로잡을 만한 도구지. 자네가 나에게 화끈한 페르몬을 만들어 주면, 나는 자네를 억만장자로 만들어 주겠네. '하드 SF 르네상스1' 중 '어느 성화학자의 생애'/스티븐 백스터 외 지음/홍인수 옮김/행복한책읽기/472쪽/1만5천원.

박지형(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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