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고스톱 칠 땐 못먹어도 '고'…미스코리아 금나나

'엄친딸(엄마 친구의 딸)'이라 했다. 착하고 공부도 잘하는데 얼굴까지 예쁘다는 뜻의 신조어다. '엄친딸'은 현실에선 찾아보기 힘든 판타지. 하지만 미스코리아 출신 금나나(26)를 떠올리면 얘기가 달라진다. 외모야 '2002 미스코리아 진'으로 이미 공인받았고, 포항과학고와 경북대 의대를 다니다 하버드대에 진학, 장학생으로 졸업했다. 물론 그녀의 판타지에도 현실감은 있다. 최고의 의사를 꿈꾸며 지난해 미국 의학대학원 26곳에 지원서를 냈지만 5곳에서만 면접 연락을 받았고, 나머지는 모두 고배를 마셨다.

지난해 말 한국에 잠시 돌아와 '나나의 네버엔딩스토리'를 낸 그녀를 지난 11일 대구 중구 교보문고에서 만났다. 사인회를 막 끝낸 그녀를 향해 수십개의 휴대전화 카메라가 렌즈를 반짝였다. 4년간의 미국 생활은 그녀에게 꽤 좋은 약이 된 듯했다. 시련과 좌절을 긍정과 자기 인정으로 바꾸는 솜씨는 스물여섯 나이가 무색할 정도. 환한 눈웃음을 지으며 조리있게 대답하는 모습이 '참 예쁘다' 싶다.

◆나나는 마음의 소리에 따른다

-어린 시절 미술학원에서 받았던 획일적인 교육 방식에 충격을 받았다면서요?

"6세 때 다니던 미술학원에서 동물원을 그리는 시간이었는데요. 선생님이 동물원을 그려주면서 따라 그리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저는 선생님 말씀을 안 듣고 제가 좋아하는 동물만 마음대로 그렸거든요. 선생님은 말을 안 듣는다며 막 혼을 내셨고 울면서 집에 갔던 기억이 나요. 그때도 좋고, 싫은 의사 표현이 강했던 것 같아요."

-'공부는 글자로 하는 미술 같은 느낌'이라고 한 적이 있죠. 어떤 의미인가요?

"제가 필기하는 걸 참 좋아해요. 여러 색깔을 사용해서 저만의 요점 정리를 만들어요.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걸 일단 연습장에 적어뒀다가 나중에 복습을 할 때 다시 정리를 해요. 노트가 오색찬란하다보니까 마치 미술하는 느낌을 받아서 그렇게 얘기했어요. 그런데 하버드에 가서도 1학년 때까지는 그렇게 했는데 3, 4학년 때는 너무 시간이 부족해서 그렇게 하진 못했어요."

-스트레스를 잘 받는 성격인가요?

"일상적인 일에는 잘 받지 않는 편이에요. (그녀는 과학고 시절 원형탈모증과 폭식증에 시달릴 정도로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했다.) 그 당시는 무너진 자아와 싸우는 시간이었어요. 중학교 때 늘 1, 2등만 하다가 과학고에 가니 성적이 많이 떨어졌거든요. 세상에는 천재도 많고 경쟁도 심하더라고요. 그 경험 덕분인지 하버드에서는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는 크지 않았던 것 같아요."

◆나나 in Harvard

-일반고 대신 과학고를, 의사의 길 대신 힘든 유학생활을 택했잖아요. 여러 선택의 기로에서 어려운 길을 선택한 이유가 뭔가요?

"저는 선택의 기로에서 정말 단순해지거든요. 이성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본능적, 직관적으로 선택을 해요. 과학고를 선택했을 때도 빨간 벽돌의 볼품없는 건물이지만 학교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선택을 했고, 경북대 의대를 포기하고 하버드대에 갔던 것도 잔디밭에 누워서 여유롭게 책을 읽는 학생의 모습이 아주 인상깊어서 도전을 결심했어요."

-후회한 적은 없나요?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은 늘 있죠. 과학고 다닐 때도 내신이 잘 안 나오니까 '그냥 일반고 가서 편하게 할 걸'이라는 생각도 했고, 하버드에서도 '그냥 경북대에 남았으면 지금쯤 의사가 됐을 텐데, 26세에 겨우 졸업장이나 따고…' 생각들을 했죠. 하지만 물은 100℃가 돼야만 끓잖아요. 99℃에서는 안 끓어요. 99℃나 50℃나 결론적으로는 같은 건데, 50℃에서 99℃까지 올라온 게 너무 아깝잖아요."

-한국과 하버드대의 교육 방식의 가장 큰 차이는 뭐였나요?

"일단 과제의 양이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아요. 그런데 과제만 많이 주는 게 아니라 제가 찾으면 도움을 구할 곳도 너무나 많아요. 교수님도 항상 질문을 받는데 열려 있고 학생들을 위해 시간을 비워두죠. 문화적 충격도 받았어요. 하버드에서는 기말고사를 치기 전에 10일간 학생들에게 공부할 시간을 줘요. 열흘이 지나면 학생들이 자정에 학교 운동장에 모여서 옷을 모두 벗고 운동장을 돌거든요. 마치 의식처럼 정착이 돼 있어요. 그 독특한 문화가 신선한 충격이었고 신기했어요. ('나나씨도 뛰었냐'는 질문에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만한 용기는 없었어요.

-의학대학원에 떨어졌을 때 심정이 어땠나요?

"26년 동안 살면서 공부하고 바라봤던 목표였는데, 실패하고 좌절하니까 정말 모든 의욕이 사라지고 세상 살기가 싫더라고요. 26년의 삶이 한줌의 재가 돼서 허무하게 날아가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죠. 의사가 되기 위한 마음의 준비가 안 됐던 것 같아요. 미국 대학에서는 성적뿐만 아니라 마음의 준비가 얼마나 돼 있는가를 중요하게 보는데요. '왜 의사가 되고 싶은가'라는 면접관의 질문에 대해 어필할 만한 대답을 못했어요. 지금도 그 답을 찾는 중이에요."

◆나나에게 미스코리아는?

-성형한 적 있나요?

"없어요. 그런데 치아교정은 계속하고 있어요. 초교 6학년 때 했었는데 고교 진학으로 영주에서 포항으로 가면서 그만뒀어요. 그 뒤로 악관절 상태가 나빠져서 교정기를 밤에 끼고 자고, 요즘에는 마무리 교정 중이에요."

-2002년 미스코리아 진에 선발된 것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미스코리아를 선발이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 같아요. 특히 세상의 많은 인연들이 시작됐죠. '미스코리아'가 된 덕분에 학생 신분으로는 만나지 못할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특이한 경험들을 할 수 있었어요. 그런 경험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졌죠. 제가 하버드를 가게 된 것도 미스 유니버스대회를 위해 영어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결심하게 되었고요. 솔직히 예쁘고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다만 저는 '미스코리아'라는 차이밖에 없는데, 언론에 의해 과대포장된 점은 인정해요. 그게 늘 부담스럽고 마음이 불편한 것도 사실이고요."

-미스코리아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해마다 미스코리아를 선발하는데, 그 사람들이 1년 임기 동안 어떻게 활동을 하느냐보다는 그 이후에 어떻게 행동을 하느냐를 더 많이 보는 것 같아요. 그 중에는 연예계에 진출하는 분들도 많고, 항상 모든 생활들이 공개되기 마련이잖아요. 그러다 보니 좋은 점보다는 나쁜 점이 더 부각이 되는 것 같아요. 사실 미스코리아를 소중한 경험으로 삼고 자신을 위해 열심히 사는 분들도 많거든요. 그런 점이 아쉽죠."

◆나나는 자신감이 부족해

-질투심이 강한 편인가요?

"질투라기보다 욕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예전에 '나나씨는 어떻게 계속 그렇게 도전하세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요. 그때 '질투가 제 힘인 것 같아요. 남들이 부러우면 그걸 얻기 위해서 도전했어요'라고 대답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요즘 생각해 보면 그건 질투가 아니라 내가 자꾸 부족하다고 느끼고 그걸 계속 채우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아요. 저는 사람들의 장점을 보면서 '내게도 저런 면이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특히 어떤 자리든 분위기도 잘 띄우고 재미있게 놀거나 리더십이 있는 친구들을 보면 닮고 싶어요."

-자신의 단점이 뭐라고 생각해요?

"제가 하는 일에 스스로 자신감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저는 시험을 치고 나서도 '정답은 제대로 썼을까?' '문제만 풀고 정답란에 쓰지 않은 건 아닐까?'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하거든요. 어찌보면 완벽주의자가 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강박관념에서 벗어났으면 좋겠어요. 또 남들은 제가 항상 밝고 쾌활한 외향적인 성격으로 보는데 사실 전 되게 내성적이에요. 외로움도 많이 타고, 사람 만나는 걸 어려워하고요. 저는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에 대해 자꾸 곱씹어서 생각하는 편인 것 같아요."

-고스톱 칠 때 3점으로 나면 '못 먹어도 고'를 하는 편인가요? 아니면 '스톱'을 외치는 편인가요?

"무조건 '고'해야죠. 3점으로 나기는 억울하잖아요. (승부욕인가요?) 승부욕은 아닌 것 같고요. 뭔지 잘 모르겠어요. 다만 저는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 그 근원이 '자기애'였으면 좋겠어요. 내가 이렇게 도전을 하는 것도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너무 사랑하니까 나를 가꾸고 보다듬는 그런 의미였으면 좋겠어요. 또 제가 실패를 하고 극복을 하는 과정도 '봐라, 이 정도로 죽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패하고 앞으로 초라한 제 모습을 감싸안는 마음에서 모든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나나씨에게 가장 영향을 미친 책이나 좋은 가르침이 뭔가요?

"하버드를 졸업하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요. 부석사 큰스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인생이 순탄하기를 바라지 마라. 일이 뜻대로 되면 뜻을 가벼운데 두나니,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음으로써 수행으로 삼아라'는 말씀이었는데요. 제가 원하는 대로 다 이뤄지면 자만감이나 자기 중심에 빠질 수 있잖아요. 나를 지키고 보호할 수 있는 것도 자신이고, 나를 파괴할 수 있는 것도 자신이잖아요. 브레이크가 걸릴 때마다 제 자신을 좀 더 겸손하게 다듬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겠죠."

◆나나는 현실적 낙관주의자

-2004년 '나나 너나 할 수 있다'를 냈을 때와 4년이 흘러 '나나의 네버엔딩스토리'를 낸 현재, 어떤 점이 변했나요?

"처음 '나나 너나 할 수 있다'를 낼 당시에는 제가 아주 이상주의자였던 것 같아요. 간절히 원하고 노력하면 언제든 그 꿈은 반드시 이뤄진다. 누구든지 노력하면 뭐든지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지금은 현실적인 낙관주의자가 된 것 같아요. 세상을 살면서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포기할 건 포기하고. 자신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됐다고 할까요. 최고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모든 능력을 최고로 이끌어내는 게 최고'로 바뀐 것 같아요."

-나나씨를 롤 모델로 삼는 이들도 많습니다.

"저는 그 분들이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가장 무서워요. '언니를 동경해요' '언니처럼 되고 싶어요' 하는 눈빛이 가장 무섭거든요. 제가 보기에 금나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 저를 롤 모델로 삼는 사람들을 보면 '아, 내가 저 눈빛에 상처주는 사람이 돼선 안 되겠다' '저 사람을 실망시키면 안 된다'라는 부담감이 굉장히 커요. 그런 부담감이 제가 계속 열심히 살게 하는 자극제인것 같아요."

-10년 뒤 금나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저도 모르겠어요. 제가 계획을 세우고 그것에 따라 움직이지는 않거든요. 오히려 마음이 원하는 것을 따라왔기 때문에 제 미래는 변화무쌍하고 예측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다만 매순간 열심히 살고 싶어요."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사진·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 금나나는?=1983년 경북 영주 출생. 경북대 의예과 1학년 시절, '2002년 미스코리아 진' 당선은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다. 이듬해 잘 다니던 의대를 그만두고 5개월 간 공부에 올인, 미 MIT와 하버드대에 동시에 합격했고, 하버드대에서 프리메드 (Pre-med· 메디컬스쿨에 입학하기 위한 과정) 코스를 이수하며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미숙한 영어때문에 강의를 녹음해 수십번씩 듣고 물으며 첫 학기 올 A라는 성적표를 받아들었고, 신입생 성적 상위 10%이내 우수모범학생들에게 주는 디튜어 상과 존 하버드 장학금을 받았다. 의학대학원 진학에 실패해 좌절감도 맛봤지만 올해 컬럼비아 대학원 영양학 과정에 합격해 의사의 꿈을 이어가고 있다. 생명과학분야 여성과학자의 발전을 위해 제정한 한국로레얄 유네스코 여성생명과학진흥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나나 너나 할 수 있다', '금나나의 공부일기', '나나의 네버엔딩스토리' 등 3권의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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