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마니아와 함께 떠나는 세계여행] 남아프리카공화국-페트병과 겨울여행

"세상에, 페트병이 이렇게 따뜻했구나"

이번 겨울 한창 추웠던 어느 밤 보일러가 고장났다. 솜이불로 몸을 꽁꽁 싸매고 잠을 자려고 애를 써보았다.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으니 숨이 막히고, 얼굴을 내놓으니 코가 시려웠다. 이런 느낌이 언젠가 또 있었는데…, 차가운 벽에서 냉기가 스멀거리고 덜컹거리는 유리창 틈으로 찬바람이 마구 들이닥치던 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도시의 모텔에서 외롭게 오돌오돌 떨던 기억이 바로 어제처럼 생생하게 밀려왔다.

그런 밤에 나는 뜨거운 물을 담은 페트병을 가슴에 꼭 껴안고 잠을 청했다. 춥고 외로운 도시에서 오로지 페트병만이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구원의 동아줄이었다.

너무 추워서 밤새 울어본 적이 있다. 그것도 열대의 대륙 아프리카에서였다. 아프리카대륙 최남단의 남아프리카공화국에도 추운 겨울이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남반구에 있는 그 나라는 우리와는 반대로 7,8월이 가장 추운 겨울이다. 2005년 8월, 나는 남아공 케이프타운 인근의 캠핑카에서 지내고 있었다.

푸른 벌판 위의 하얀 캠핑카들. 처음 그 곳을 발견했을 때 나는 홀딱 반했다. 파란 하늘에 걸린 빨래들이 기분 좋은 햇살과 냄새 좋은 바람에 잘 마르고 있는 폼이 예뻤다. 작은 캠핑카들에서 구부정한 자세로 기어나오는 사람들의 느린 움직임이 귀여워 보였다. 조용하고 넓은 캠핑장을 혼자서 뛰어다니는 거위 한 마리와, 녀석을 피해 부산하게 숨어다니는 닭 몇 마리는 마치 만화영화 주인공처럼 내게 말을 걸어올 것 같았다.

게다가 캠핑카 한 대 빌리는 값은 케이프타운 시내 숙박비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쌌다. 캠핑카 안은 작지만 귀여운 침대와 책상과 의자, 그리고 싱크대와 가스레인지, 냉장고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곳은 오랜 여행에 지친 사람이 경비 걱정없이 쉬어가기에는 완벽한 명당이

었다. 나는 그곳을 보자마자 바로 일주일을 계약하고 곧장 짐을 풀었다.

하지만 '집 떠나면 다 고생'이란 말은 언제나 예외없이 들어맞는다. '여행'이라는 것이 하루라도 완벽하게 편할 리 없다. 그날 밤, 나는 이곳에서의 일주일이 결코 순탄치 못하리라는 걸 깨달아야 했다. 아니 눈물 나게 힘든 고생이 될 것임에 분명했다. 바로 그 첫날부터 이불 속에서 꺼억꺼억 울었던 그 기억은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남아프리카의 겨울은 얄밉다. 대낮에는 봄날씨처럼 화창한 햇살이 겨울 찬바람을 치마폭에 싸안아 숨겨놓는다. 해변에는 심지어 해수욕과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돌아다닌다. 그러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는 3,4시만 되면 금새 숨어있던 칼바람이 흉악한 모습을 드러낸다. 낮에는 민소매 티셔츠, 밤에는 오리털파카를 입어야 하는 날씨다.

대낮의 파란 하늘과 잘 마르는 빨래에 속은 나는 남아프리카의 겨울밤을 난방시설 하나 없는 차가운 고철상자 같은 캠핑카에서 보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몰랐던 거다. 게다가 화장실과 욕실은 버스정류장처럼 멀었다. 화장실 한 번 다녀오는 게 눈물 콧물 쏟아내야 할 만큼 큰 일이다. 너무 추워서 뜬 눈으로 밤을 꼴딱 샌 다음날 아침, 밤새 칼바람에 덜컹거리던 창문으로 눈부신 초록빛 햇살이 거짓말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그제야 나는 폭풍 속을 빠져나온 듯 잠이 들었고, 다시 추위가 시작되는 밤에 눈을 번쩍 떴다.

여행이 아니라면 누가 이런 고생을 사서 할까. 여행이란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굳이 혼자 추위와 배고픔과 외로움을 견디는 것. 나는 눈물 나도록 춥고 고통스러운 밤을 보내면서도 내일 아침 당장 짐을 싸서 떠나겠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못했다. 미리 낸 일주일치 캠핑카 대여료 때문이다. 첫날 화창한 햇살 아래 느릿느릿 여유롭게만 보였던 캠핑족들은 알고보니 모두 나처럼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나야 여행자니까 일주일만 견디다 떠나면 되지만, 여기서 생활을 꾸리는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모두들 바짝 웅크리고 매서운 겨울을 버티고 있는 삶의 전쟁터에서 나는 제멋대로 낭만을 꿈꾸었다.

버스정류장처럼 멀고 먼 화장실 앞에서 옆 캠핑카에 살고 있는(맨날 구부정한 뒷모습만 보아온) 남자를 만났다. 남자는 묵직한 페트병 네 개를 소중하게 가슴에 껴안고 있었다. 그는 코를 풀며 오돌오돌 떨고있는 나에게 페트병 두 개를 건네주었다. 뜨끈뜨끈하고 짜릿한 감동이 가슴에 가득 차올랐다. 조금이라도 온기가 있는 무언가를 만져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나는 갑자기 엄마품이라도 만난 것처럼 울컥 서러워졌다. 늘 춥고, 늘 괴롭고, 늘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갑자기 폭발해버렸다. 나는 페트병을 껴안고 또 울어버렸다.

보일러가 고장난 며칠 전 그 날, 베란다의 분리 수거함을 뒤져 페트병 하나를 찾아냈다. 뜨거운 물을 담아 가슴에 품고 솜이불 속으로 기어들었다. 따뜻한 기운과 함께 울컥 여행의 그리움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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